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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스텔앤컨 SP2000, 칩에 맞춰 회로를 다시 짰다

AK4499EQ는 소리를 전압이 아니라 전류로 내보내는 DAC였다. 아스텔앤컨은 이 칩을 제대로 쓰려고 옵앰프와 아날로그 앰프 블록을 처음부터 새로 설계했다. 그리고 1년 뒤, 일본의 한 공장에 불이 났다.

아스텔앤컨 SP2000, 칩에 맞춰 회로를 다시 짰다

2019년 5월 독일 뮌헨. 유럽 하이엔드 오디오 업계가 한 해 한 번 모이는 하이엔드 뮌헨(High End Munich)에서 아스텔앤컨이 새 플래그십 A&ultima SP2000을 처음 꺼내 보였다. 스테레오넷이 5월 9일 전한 소식이다. 손바닥에 올라가는 금속 덩어리에 5인치 화면, 겉만 봐서는 전작과 무엇이 다른지 짚기 어려운 물건이었다.

달라진 곳은 안이었다. 기판에는 보통 하나면 충분한 DAC 칩, 그러니까 디지털 음원을 아날로그 소리 신호로 바꿔 주는 칩이 똑같은 것으로 두 개 올라가 있었다. 칩을 하나 더 넣으면 부품값이 오르고 열도 더 나며 전원 설계도 까다로워진다. 그런데도 아스텔앤컨은 그렇게 만들었다. 이 선택을 이해하려면 칩만이 아니라 회사가 놓인 처지도 같이 봐야 한다. 한때 국내 MP3플레이어 시장을 이끌던 회사가 자기 물건의 존재 이유를 통째로 잃은 뒤의 이야기다.

아스텔앤컨 KANN 플레이어와 이어폰
SP2000과 같은 시기에 나온 자매 기종 KANN. 브랜드 특유의 금속 몸체가 그대로 드러난다.

Kansai explorer · Wikimedia Commons · CC BY-SA 4.0

뮌헨 공개 직전에 올라온 SP2000 티저

금속 마감과 각진 몸체를 훑고 지나가는 짧은 제품 티저 영상

E1 Personal Audio

MP3 1등에서 밀려난 아이리버

아이리버가 처음부터 오디오 애호가를 위한 기계를 만들던 회사는 아니었다. 그때 이름은 레인콤이었고 2000년대 초중반 국내 MP3플레이어 시장의 1등이었다. 코리아헤럴드가 2016년에 정리한 바로는 '큐빅' 디자인 플레이어로 국내 시장의 70%와 해외 시장의 25%를 쥐고 있었다.

아이리버 iHP-120 하드디스크 플레이어
2003~2004년경 아이리버가 팔던 하드디스크 플레이어 iHP-120.

Andrew Skudder · Wikimedia Commons · CC BY-SA 2.0

판이 바뀌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코리아헤럴드는 2007년 아이폰이 인터넷과 카메라를 한 기기에 몰아넣으면서 아이리버를 '벼랑 끝(brink of collapse)'까지 밀어냈다고 썼다. 전화기가 음악까지 틀어 주자 음악만 트는 기계는 왜 따로 사야 하는지를 설명해야 했다. 2012년 무렵에는 대중 시장이 이미 사라져 있었다.

아이리버 H10 디지털 오디오 플레이어
2000년대 중반, 아이팟과 정면으로 맞서던 아이리버 H10.

Yarl · Wikimedia Commons · CC BY-SA 3.0

회사는 스마트폰과 정면으로 맞붙는 대신 스마트폰이 거들떠보지 않는 하이파이 애호가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대중을 내준 자리에 이들만을 위한 프리미엄 서브브랜드를 세웠다. 박일환 당시 아이리버 대표는 몇 해 뒤 코리아헤럴드에 그 선택을 한 문장으로 요약했다. “Because the high fidelity sound moves our hearts; smartphones cannot.” 하이파이의 소리는 마음을 움직이지만 스마트폰은 그러지 못한다는 말이었다. 스마트폰이 내는 소리는 원본의 20~30퍼센트뿐이라고도 했다.

첫 제품 AK100은 2012년 10월에 나왔다

이 브랜드가 언제 시작됐는지부터 기록이 갈린다. 영문 위키피디아는 2013년 10월에 세워졌다고 적고 영국 공식 페이지도 첫 제품이 2013년에 나왔다고 쓴다. 당시 기사가 가리키는 연도는 다르다. 첫 제품 AK100은 2012년 10월 한국에서 먼저 나왔고 11월에는 일본·이탈리아·폴란드로 수출이 시작됐다. 미국 판매는 현지시간 12월 4일 699달러로 시작됐다. 2013년은 창립이 아니라 CES에 처음 나간 해다.

AK100이 내세운 것은 최대 24비트/192kHz의 이른바 '마스터링 퀄리티 사운드(MQS)' 재생이었다. 아이리버는 미국에 들어가면서 고음질 음원 서비스 HDtracks와 손잡고 MQS 음원을 공급했다. 위키백과에 남은 사양은 2.4인치 QVGA 터치스크린에 월프슨 WM8740 DAC, 32GB 내장, 122g이다. 지금 보면 소박하지만 대중 시장에서 물러난 회사가 처음 만든 물건이 이것이었다.

이름의 뜻도 회사 설명과 실제 낱말이 어긋난다. 공식 소개 페이지는 “Astell means 'star' in Greek, and Kern means 'core' in German”이라고 적고, 코리아헤럴드는 이를 '별들의 중심'이라 옮겼다. 그런데 그리스어에서 별을 가리키는 낱말은 astēr·astron 계열이다. Kern이 독일어로 '핵심'인 것은 맞지만 Astell 쪽은 브랜드가 지어낸 말에 가깝다.

브랜드를 누가 구상했는지도 분명하지 않다. 창업주 양덕준이 사장 자리에서 물러나기 전에 이미 이름과 초기 기획안을 잡아 뒀다는 이야기가 있다. 분명한 것은 아스텔앤컨이 끝까지 따로 세운 법인이 아니라 아이리버, 뒷날의 드림어스컴퍼니 안의 사업부문이었다는 점이다. 데이브 장은 2021년 인터뷰에서 1999년에 세워진 아이리버의 개발 경험이 이 플레이어들의 바탕이 됐다고 설명했다.

미국 데뷔는 매끄럽지 않았다. 2013년 1월 CES에서 미국 언론 앞에 처음 선 AK100의 반응은 엇갈렸던 것으로 전해진다. 평이 올라간 것은 그해 8월 월프슨 WM8740 DAC를 두 개 실은 AK120이 나온 뒤였다. 칩을 두 개 쓰는 구성은 이때 시작된 셈이다. AK120이 처음 공개된 자리는 2013년 5월 9일 하이엔드 뮌헨이었다고 기록돼 있다. 6년 뒤 SP2000이 선 무대와 같은 곳이다.

2014년, SK텔레콤에 팔린 회사

브랜드가 자리를 잡아 가는 사이 회사는 팔렸다. SK텔레콤은 2014년 6월 13일 아이리버 인수 우선협상대상자로 뽑힌 뒤 6월 24일 본계약을 맺고 보통주 약 1,024만 주를 295억원에 넘겨받았다. 아이리버를 넘긴 보고펀드는 2007년 약 600억원에 이 회사를 사들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7년 뒤의 295억원은 그 절반이다.

SK텔레콤이 아스텔앤컨의 고해상도 오디오 성장성을 보고 인수에 나섰다는 설명이 흔히 따라붙는다. 그때 SK텔레콤이 내세운 명분은 달랐다. 하성민 사장은 2014년 6월 11일 “아이리버 인수 추진은 단말 비즈니스 경쟁력을 높이기 위한 것”이라며 “이동통신 서비스 사업자가 IoT 사업을 잘하려면 무엇보다 단말 이해도를 높여야 한다”고 말했다. 앱세서리를 늘리고 IoT 시대에 쓸 단말 기획 능력을 회사 안에 쌓겠다는 이야기였다.

팔리는 아이리버 쪽에서는 오디오의 성장성을 앞세웠다. 박일환 사장은 같은 해 8월 “'아스텔앤컨'이 포터블 하이-파이 오디오 시장에서 확고한 입지를 구축해나가고 있다”고 했고, 그 시점에 브랜드는 약 30개국에 나가 있었다. 회사 사정도 나아져 2014년 상반기에 5년 만에 흑자로 돌아섰다고 보도됐다.

소리가 전류로 나오는 DAC

SP2000에 들어간 칩은 일본 반도체 회사 AKM의 AK4499EQ다. 이 칩의 성격은 성능표보다 출력 방식에서 드러난다. AKM이 2018년 12월에 낸 제품 설명 자료를 보면 AK4499는 소리를 전압이 아니라 전류로 내보낸다. 그래서 칩 뒤에 전류를 전압으로 바꿔 주는 회로(I/V 변환단)를 따로 붙여야 비로소 소리가 된다.

전압으로 나오는 칩은 뒷단을 크게 건드리지 않고 갈아 끼우면 된다. 전류로 나오는 칩은 그 전류를 받아 줄 회로를 새로 만들어야 한다. 칩 하나 바꾸는 일이 구조를 뜯어고치는 일로 커진다. 아스텔앤컨 공식 제품 페이지는 이 출력 방식을 온전히 쓰려고 옵앰프와 아날로그 앰프 블록을 처음부터 완전히 새로 설계했다고 밝힌다. 칩 하나를 제대로 쓰는 데도 뒷단 전체를 다시 짜야 했다.

AK4499EQ의 공식 사양은 그때 기준으로도 넘쳤다. 잡음과 왜곡이 얼마나 적은지 보여 주는 수치(THD+N -124dB, SNR 스테레오 137dB)가 그렇고, 32비트에 768kHz까지 받았다. AKM이 '벨벳 사운드'라 부르던 계보의 꼭대기였다.

듀얼 DAC라고 하면 칩 하나가 왼쪽, 하나가 오른쪽을 맡는 그림을 떠올리기 쉽다. AK4499에는 그 그림이 잘 맞지 않는다. 이 칩은 한 개가 DACL1·DACR1·DACL2·DACR2라는 내부 채널 네 개로 이뤄진 '4채널 스위치드 레지스터 DAC'이기 때문이다. 두 개를 쓰면 내부 채널은 여덟 개가 된다. 좌우로 반씩 나누기보다 여러 채널을 겹쳐 쓰는 더 촘촘한 구성(병렬·차동)일 가능성이 크지만 실제 배선이 공개된 적은 없다. 전작 SP1000은 AK4497EQ를 좌우에 하나씩 얹었다. 같은 듀얼이어도 AK4499는 AKM의 첫 전류출력형 플래그십이고, SP2000은 그 출력 방식에 맞춰 회로를 다시 짠 아스텔앤컨의 첫 기기다.

두 벌로 갈라놓은 출력 회로

구조가 바뀐 곳은 DAC 뒤에서 끝나지 않았다. SP2000은 일반 3.5mm 단자(언밸런스드)와 밸런스드 단자에 각각 따로 오디오 채널과 증폭 회로를 둔 첫 아스텔앤컨 플레이어다. 블로터는 2019년 9월 기사에서 이전 세대가 두 출력을 '스위치 모드'로 바꿔 가며 썼다고 설명했다. 한 벌을 번갈아 쓰던 회로를 아예 두 벌로 나눈 셈이다. 기판 자리도 전력도 더 드는, 대중 제품이었다면 결재가 나지 않았을 결정이다.

측정치를 보면 1kHz 기준 SNR이 언밸런스드 124dB, 밸런스드 125dB다. headphones.com 리뷰는 출력단이 SP1000보다 50% 강해졌다고 적었다. 소리를 더 크게 키우는 힘이라기보다 구동이 까다로운 헤드폰을 흔들림 없이 울려 줄 여유에 가깝다.

밸런스 출력은 헷갈리기 쉬운데 SP2000은 2.5mm 4극만 받는다. 요즘 표준처럼 여겨지는 4.4mm 단자는 이 기기에 없고 SE180·SE200 같은 뒷세대에 들어갔다. 대신 언밸런스드 3.5mm 단자가 광출력을 겸한다.

나머지 사양은 이 급의 플레이어에서 기대할 만한 수준이다. 내장 512GB에 microSD로 1TB까지, PCM은 768kHz까지 32비트, DSD512 네이티브. 5인치 화면에 3,700mAh 배터리로 최대 8시간이다. 다만 그 8시간은 FLAC 16비트/44.1kHz를 언밸런스드로 틀고 볼륨 80에 EQ와 화면을 끈 조건에서 나온 숫자다.

소재가 소리를 바꾸는가

겉모습에도 회사가 붙여 둔 설명이 있다. 공식 제품 페이지는 디자인의 출발점을 '플레이어 주위로 빛이 퍼지는 모습(the dispersion of light around the player)'에 빗댄다. 마감은 스테인리스 스틸과 구리, 베가스 골드와 오닉스 블랙이다. 무게는 앞의 셋이 410.8g, 구리가 432.4g이다. 마감 품질에는 이견이 적다. headphones.com 리뷰는 SP2000의 세공과 소재가 최신 아이폰·아이패드를 포함한 어떤 주류 소비자 기기보다 위라고 평가했다고 전해진다.

소재가 소리를 바꾸느냐는 질문도 오래 따라붙었다. 돌아다니는 이야기는 스테인리스가 또렷하고 구리가 따뜻하다는 쪽이다. 그런데 headphones.com 리뷰어는 볼륨을 똑같이 맞춘 블라인드 비교에서 섀시 소재에 따른 차이를 들어 본 적이 없다고 썼다. “To date, in level-matched blind comparisons, I've never personally been able to discern any audible difference between A&K's players based on different chassis materials” 실측에서도 26~30kHz가 약 1dB 올라간 정도만 잡혔고, 두 모델은 같은 값에 팔렸다.

스테인리스 스틸과 구리를 나란히 놓고 본 당대 리뷰

두 마감을 나란히 놓고 견준 2019년 국내 리뷰 영상

포터블웨이브 Portable Wave

리뷰가 갈린 지점

평가는 대체로 후했지만 후한 이유가 서로 달랐다. 헤드포니아는 SP2000을 극적인 재설계가 아니라 '정제(refinement)'로 봤다. “You go for a Refinement! And that's exactly what I found while spending the last 2 weeks with SP2000 SS.” 이미 잘하던 것을 조금 더 정확하게 해내는 물건이라는 뜻이다.

같은 변화를 두고 평이 엇갈리기도 했다. 더테크노보어는 2019년 6월 27일 핸즈온에서 SP2000을 SP1000에 견준 '조금 나아진 정도의 업그레이드(incremental upgrade)'로 봤다. 앰프 출력과 SNR 개선이 주된 변화이고 SP1000이 있다면 갈아탈 이유가 없다는 취지였다.

차이를 들었다는 리뷰도 있었다. 리뷰어 twister6는 스테인리스 스틸 모델을 2주간 쓰고 나서 홀로그래픽한 사운드스테이지와 층이 살아 있는 해상력을 꼽았다. headphones.com은 SP2000이 소니 NW-WM1Z와 자사 SP1000 라인보다 앞선다고 적었다. 리뷰가 이렇게 갈린 데서 설계 이야기와 실제로 들리는 차이 사이의 간격이 드러난다.

2020년 10월, AKM 노베오카 공장의 불

1년 뒤 일본에서 벌어진 일은 이 설계 전체가 칩 하나의 공급에 얼마나 매달려 있는지 드러냈다. 2020년 10월 20일 AKM의 노베오카 반도체 공장에서 불이 났고, 사흘간 이어졌다는 것이 당시 업계 매체들의 기록이다. 하필 오디오용 DAC·ADC 칩을 만들던 라인이었다. AKM 홍보총괄 세키즈카 타로는 2022년 2월에야 “The fire is believed to have started inside a cleanroom, so we are reinforcing fire prevention measures inside cleanrooms at our other plants”라고 말했다. 발화 지점이 '추정된다'는 말은 1년이 훌쩍 지나도록 원인이 또렷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파장은 업계 전체로 번졌다. 보도에 따르면 RME·JDS랩스·토핑·데논·마란츠·아스텔앤컨 등 최소 18개 업체가 칩 공급 차질의 영향권에 들었다. 커뮤니티에서는 AK4490·AK4493 같은 대중 모델까지 목록이 돌았고, 정상으로 돌아오는 데 '거의 12개월'이 걸릴 것이라는 추정도 인용됐다. 화재 직후에는 AK4497과 AK4499만큼은 다른 라인일 것 같다는 관측도 있었지만 뒤이어 벌어진 일은 그 낙관과 달랐다.

AKM 없이 플래그십을 만든다는 것

다음 플래그십에서는 칩이 바뀌었다. 보도 기준으로 2021년 10월에 나온 SP2000T는 이름에 SP2000을 달고도 듀얼 AK4499EQ 대신 ESS 세이버 ES9068AS를 네 개 썼다. 여기에 코르그 Nutube 6P1 진공관과 OP앰프, 둘을 섞은 하이브리드를 오가는 '트리플 앰프 시스템'을 얹었다. 여러 리뷰와 보도가 이 전환을 화재로 생긴 공급 부족과 연결했지만, 아스텔앤컨이 그 이유를 직접 밝힌 공식 문구는 찾아보기 어렵다.

브랜드 쪽에서는 AKM 없이도 플래그십을 만든다고 설명했다. 데이브 장은 2021년 인터뷰에서 “AKM factory burned down is a pity but it doesn't mean that there will be no flagship without AKM DAC”라고 했다. AKM 공장이 탄 것은 유감이지만 AKM DAC가 없다고 플래그십이 사라지지는 않는다는 말이었다. 음질을 정하는 것이 DAC만은 아니고 전원과 노이즈, 신호 변환, 회로 구조가 모두 소리의 성격을 만든다고도 했다. 칩 두 개를 앞세워 물건을 팔던 회사도 칩만으로 음질을 설명하지는 않았다.

AKM의 복귀는 느렸다. 후속 칩 AK4499EX는 2022년 4월 20일에야 발표됐고 그해 9월 8일에야 양산 출시를 알렸다. 이 칩은 ΔΣ 변조기를 맡는 AK4191과 한 쌍으로 디지털과 아날로그를 갈라놓는 2칩 구성이라 단일 칩 AK4499 자리에 그냥 꽂을 부품이 아니었다. 화재에서 신형 칩 발표까지 18~19개월이 걸렸고 그 공백 동안 플래그십에는 AKM 칩이 쓰이지 않았다.

AKM 칩이 돌아온 제품에서는 칩 수가 늘었다. 2022년 9월의 SP3000은 AK4499EX 네 개에 AK4191EQ 모듈레이터 두 개를 더한 'HEXA 오디오 서킷'으로 돌아왔다. 칩 여섯 개, SP2000의 두 개에 견주면 세 배다. 뒤를 잇는 SP4000T는 듀얼 AK4499EX에 AK4191EQ 두 개, 레이시온 JAN6418 진공관 네 개를 묶은 구성이다. 칩 두 개로 시작한 이야기는 세대마다 칩 수와 구성이 달라지는 쪽으로 흘렀다.

주인이 다시 바뀌는 회사

후속 기계가 나오는 동안 회사 이름과 주인도 계속 바뀌었다. 아이리버는 2019년 3월 28일 사명을 드림어스컴퍼니로 바꾸고 음원 유통을 주력으로 돌린 것으로 기록된다. SP2000이 뮌헨에 나오기 한 달 반 전이다. SK텔레콤이 2021년 11월 1일 인적분할로 SK스퀘어를 세우면서 드림어스컴퍼니는 그 계열로 넘어간 것으로 알려져 있다.

2024년 12월 30일 드림어스컴퍼니는 아이리버·아스텔앤컨 디바이스 사업부문을 50억원에 넘기는 영업양도 계약을 맺었다. 홍콩 자회사와 그 아래 중국 자회사도 함께 넘어갔다. 인수자인 (주)미왕은 1966년에 세워진 부동산 전문업체다. 이데일리는 2025년 3월 2일 매각 완료를 보도했다. 회사는 음악·엔터 중심으로 정체성을 또렷하게 하려는 전략이라고 설명했고, 블로터는 SK스퀘어가 핵심이 아닌 자산을 돈으로 바꾸는 흐름을 배경으로 짚었다.

그래서 영문 위키피디아의 'Astell&Kern is wholly owned by Dreamus'라는 문장은 지금의 소유 관계와 맞지 않는다. 2025년 2월 이후 아스텔앤컨은 SK 계열도 드림어스컴퍼니 소속도 아니다. 새 주인 미왕은 오디오와 무관한 부동산 회사로 알려져 있지만 인수 직후 음향기기 부문을 다시 자회사로 떼어냈고, 경영진이 오디오파일이라 오히려 긍정적일 것이라는 관측이 붙었다. 600억, 295억, 50억. 거래 대상은 회사 전체에서 지분으로, 다시 사업부문으로 좁아졌고 값도 그만큼 내려갔다. 그러는 동안에도 플래그십은 세대마다 나왔다.

아스텔앤컨 로고
아스텔앤컨 워드마크 로고.

Astell&Kern web · Wikimedia Commons · Public domain

한국 출시가는 428만원

국내 출시는 뮌헨에서 넉 달이 지난 2019년 9월 26일이었다. 출고가는 428만원, 한국을 시작으로 일본·중국·미국·영국·호주·독일 등 42개국 순차 출시가 예고됐다. 드림어스컴퍼니 백창흠 디바이스부문장은 출시를 알리며 SP2000을 “현존 최고의 포터블 하이파이 플레이어”라고 불렀다.

아스텔앤컨 첫 제품 AK100의 출시회는 2012년 10월 10일 압구정 풍월당에서 열렸다. 그렇게 시작한 브랜드가 7년 만에 400만원대 플래그십을 42개국에 내놓겠다고 말하는 회사가 됐다.

회사는 이듬해에도 기술력과 디자인을 앞세웠다. 백창흠은 2020년 1월 세계일보 인터뷰에서 “아스텔앤컨의 신제품들이 우수한 기술력과 디자인으로 오디오 선진국인 미국과 유럽을 넘어 남미와 중동에서까지 오디오 애호가들의 선택을 받고 있다”고 말했다. 나무위키가 적어 둔 후속 SP4000T의 국내 출시는 2026년 7월·598만원이다. 풍월당에서 첫 제품을 선보였을 때에 비하면 플래그십의 값은 한참 올라 있었다.

  • 아스텔앤컨의 첫 제품 AK100은 2012년 10월에 나왔다 — '2013년 설립'은 CES 데뷔 연도와 뒤섞인 기록이다

  • AK4499EQ는 소리를 전류로 내보내는 DAC였고 아스텔앤컨은 그 칩을 쓰려고 옵앰프와 아날로그 앰프 블록을 처음부터 다시 설계했다

  • SP2000은 언밸런스드와 밸런스드에 회로를 따로 둔 첫 아스텔앤컨 플레이어다 — 밸런스 단자는 2.5mm 4극 전용이고 4.4mm는 없다

  • 소재별 음색차는 정설이 아니다 — headphones.com은 레벨 매칭 블라인드에서 차이를 듣지 못했고 실측 차이도 26~30kHz의 약 1dB뿐이었다

  • 2020년 10월 20일 AKM 노베오카 공장 화재 뒤 플래그십은 ESS로 우회했고 AKM 복귀는 2022년 SP3000에서야 이뤄졌다

“MP3가 스튜디오에서 녹음된 음질의 극히 작은 부분만 전달한데 비해 MQS를 듣는 사용자는 그 감동을 그대로 느낄 수 있다.” — 박일환 당시 아이리버 대표, 2012년 미국 진출을 알리며

SP2000의 설계는 전류로 소리를 내보내는 DAC를 제대로 쓰겠다는 데서 출발했다. 스펙표를 부풀리려고 칩을 두 개 넣은 물건이 아니다. 그 뒤에 붙는 회로를 통째로 새로 만든 결과다. 언밸런스드와 밸런스드에 회로를 따로 둔 선택은 측정치에서도 리뷰에서도 좋은 점수를 받았지만, 헤드포니아가 '정제', 더테크노보어가 '조금 나아진 정도의 업그레이드(incremental upgrade)'라 부른 데서 보이듯 귀에 들리는 차이는 설계를 바꾼 폭만큼 크지 않았다. 1년 뒤 노베오카의 불은 이 모든 설계가 칩 하나의 공급에 매달려 있었다는 사실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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