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각기둥으로 아이팟과 싸운 아이리버 프리즘
삼성을 나온 사람들이 세운 벤처는 삼각기둥을 골랐고 애플은 손가락으로 돌리는 원반을 택했다. 시제품에 30곡을 담던 회사가 1,000곡을 내세운 상대와 맞붙었다. 기기를 잘 만드느냐보다 누구와 싸우느냐가 회사의 운명을 갈랐다.
엔지니어가 시제품을 들고 왔다. 크기를 1mm만 늘려 달라는 요청이었다. 삼각기둥 단면 안에 플래시메모리와 회로, AA 건전지 한 알을 넣어야 했으니 터무니없는 부탁도 아니었다. 돌아온 대답은 짧았다고 한다. 구겨 넣어. 양덕준 사장이 한 말로 전해진다.
석 달 안에 2만6000대
일정이 급했다. 비즈니스위크와 뒷날의 회고 기사들에 따르면 양덕준은 반년 가까운 협상 끝에 미국 유통사 베스트바이에서 계약이 아닌 조건 하나를 받아 왔다. 석 달 안에 플래시 MP3 플레이어 2만6000대. 이 회사가 한 번도 만들어 본 적 없는 물건이었다. 비즈니스위크의 2004년 1월 기사를 보면 주문이 들어온 때는 2002년 6월, 납기는 9월 20일이었고 8월까지 30곡이 들어가는 시제품을 내놓아야 했다. 그보다 여덟 달 앞서 나온 어떤 기계는 이미 1,000곡을 내세우고 있었다.
이름은 삼각기둥에서 나왔다
삼각기둥을 그린 사람은 이노디자인의 김영세였다. 프리즘이라는 이름은 빛을 꺾는 유리 조각과 단면이 같아서 붙었다. 삼각기둥은 원기둥처럼 구르지 않고 납작한 판처럼 손에서 미끄러지지도 않는다. 그 단순한 기하학이 이 물건의 전부이자 출발점이었다.
이노디자인이 공개한 수상 이력을 보면 김영세는 골프백 프로텍으로 1991년 IDEA 동상, 가스버너 랍스터로 1993년 금상, 잠금식 지퍼로 1999년 은상을 받은 뒤 2002년에 프리즘을 맡았다. 신생 벤처는 이런 이력을 지닌 디자이너에게 직접 일을 맡겼다.
2004년 카메라를 단 iFP-1000이 나왔을 때도 프리즘의 몸통이 거의 그대로 다시 쓰인 것으로 정리된다. 목걸이 고리가 있던 자리가 렌즈로 바뀐 정도였다. 공교롭게도 2005년 전자신문은 김영세와 조너선 아이브를 나란히 놓은 기사를 실었고, 그 기사는 스티브 잡스가 아이브를 “천만금을 주고도 바꾸지 않을 사람”이라 평했다고 전한다. 한쪽은 디자이너를 사내에 두었고 다른 한쪽은 디자인을 밖에서 사 왔다. 두 회사가 그 뒤에 겪은 일은 완전히 달랐다.

Lokal_Profil · Wikimedia Commons · CC BY-SA 3.0 · Lokal_Profil · CC BY-SA 3.0
삼성을 나온 사람들이 세운 회사
레인콤은 1999년 1월 20일에 문을 열었다. 창업자 양덕준은 1951년에 태어나 1978년 삼성반도체에 들어갔고 수출담당 이사까지 지냈다. 창업 멤버에 대해서는 삼성 출신 일곱 명이 함께 세웠다는 기록과 양덕준 혼자 세웠다는 기록이 함께 남아 있다. 레인콤은 2003년 12월 19일 코스닥에 이름을 올렸다.
흔히 아이리버의 첫 제품이 프리즘이라고 이야기하지만, 자료들이 가리키는 첫 제품은 2000년 11월에 나온 CD형 MP3 플레이어 iMP-100이다. 미국에는 소닉블루의 리오볼트라는 이름으로 나가 여섯 달 만에 CD-MP3 부문 1위에 올랐다고 전자신문 회고는 전한다. 프리즘은 첫 제품이 아니라 첫 플래시 플레이어였다.
2000년에 회사 이름을 아이리버로 바꿨다는 말도 자주 보인다. 하지만 레인콤과 아이리버는 애초에 같은 법인의 회사명과 브랜드명이었다. 법인명이 주식회사 아이리버로 바뀐 것은 2009년 3월 27일 주주총회를 거쳐서다. 2000년에 나온 것은 사명이 아니라 브랜드였다.
2002년이 저물 무렵 아이리버는 국내 시장의 5분의 1 가까이를 쥐었다고 영문 위키피디아는 정리한다. 회사가 크는 동안 창업 멤버 사이에는 갈등도 생겼다. 몇 해 뒤 초기 멤버였던 이래환 부사장이 전자사전 회사 에이트리를 차려 나갔고, 양덕준은 경영진에 떠밀려 마지못해 소송을 냈다고 전해진다. 법원은 유죄로 판결했다고 보도됐다. 삼성을 함께 나온 사람들이 법정에서 헤어졌다.
주머니에 1,000곡
무대는 2001년 10월 23일이었다. 애플이 내놓은 것은 5GB 하드디스크와 파이어와이어 포트를 갖춘 399달러짜리 기계였고, 거기 붙은 문장은 한 줄이었다. “1,000 songs in your pocket”. 미국 매장에 실제로 깔린 것은 11월 10일부터다. 애플은 처음부터 용량을 무기로 내세웠다.
당시 평가 가운데는 뜨거운 것도 있었다. CNET의 엘리엇 밴 버스커크는 2001년 11월 2일 리뷰에서 “번개처럼 빠른 파이어와이어 전송, 작은 크기, 훌륭한 디자인, 게다가 5GB 용량”을 꼽으며 아이팟을 “10년 안에 우리 모두가 들고 다닐 데이터 지갑의 시제품”이라 불렀다. 지금 각자의 주머니에 든 기기를 보면 그 예언이 얼마나 맞았는지 알 수 있다.
아이팟 하면 떠오르는 휠에도 순서가 있다. 애플 보도자료를 따르면 2001년 1세대 아이팟이 쓴 것은 물리적으로 도는 스크롤휠이었고, 2002년 7월 2세대에 처음 실린 것은 움직이는 부품이 없는 터치휠이었다. 우리가 아이팟의 상징으로 기억하는 클릭휠은 2004년 1월 아이팟 미니에서 처음 나왔다. 프리즘이 태어난 2002년 여름에 클릭휠은 아직 세상에 없었다.
애플은 원반을 다듬어 가며 때에 맞춰 후속작을 내놨다. 아이팟 미니는 2004년 1월 6일 발표돼 2월 20일 4GB 249달러로 나왔다. 2005년 9월 7일에는 나노가 2GB 199달러, 4GB 249달러로 나왔다. 누적 판매는 2007년 4월 9일에 1억 대, 2009년 9월 9일에는 2억2000만 대를 넘었다.
Tokumeigakarinoaoshima · Wikimedia Commons · CC0 · Tokumeigakarinoaoshima · CC0
2001년 10월 23일 아이팟 첫 공개 행사 기록. ‘주머니 속 1,000곡’이 어떤 말투로 나왔는지 볼 수 있다.
정점은 2004년이었다
아이리버는 2003년에 512MB와 1GB 플래시 플레이어를 세계에서 처음 내놨다고 비즈니스위크는 전한다. 같은 매체는 2004년 1월 「Korea's ReignCom: Moving Up The MP3 Charts」에서 이 회사의 플래시 플레이어를 미국 시장에서 같은 급 가운데 맨 윗줄에 올렸다. 하드디스크가 용량으로 이기던 시장에서 이쪽도 용량을 남보다 한 걸음씩 먼저 늘리며 싸웠다. 30곡짜리 시제품을 급히 만들던 해로부터 겨우 한 해가 지나 있었다.
국내 점유율은 2003년 52%로 전해지고, 2004년에는 국내 약 110만 대에 해외 170만 대를 더해 280만 대를 팔았다는 기록이 있다. 자료마다 숫자는 조금씩 다르지만 어느 쪽으로 보아도 국내 1위였다.
매출은 2001년 534억원에서 2004년 4540억원으로 뛰었다. 창업 초기 매출이 12억원이었다는 회고가 맞다면 5년 만에 수백 배다. 부문을 갈라 보면 플래시 쪽 세계 점유율이 17.5%, 하드디스크 쪽이 6%였다고 코리아IT타임스는 전했다. 이 무렵 회사는 표기를 iRiver에서 소문자 iriver로 바꾸고 로고도 파랑에서 루비레드로 갈아입혔다. 그때는 아무도 이 해가 정점이라는 사실을 몰랐다.
미국 신문도 아이리버를 다루기 시작했다. 2004년 4월 데저렛 뉴스는 아이팟 미니 열풍을 다루면서 초소형 플레이어 시장의 경쟁자로 톰슨 RCA와 아이리버의 이름을 나란히 올렸다. 같은 해 8월 전략기획팀장 김동환은 코리아IT타임스 인터뷰에서 경쟁에서 살아남게 하는 것은 브랜드 힘이고 앞서 나가려면 품질만큼 디자인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이후 이 회사가 벌인 거의 모든 일이 그 말을 따랐다.

Lokal_Profil · Wikimedia Commons · CC BY-SA 3.0
미국에서 노린 자리는 2등
2004년 10월 21일 PR 업계지 PRWeek는 「Second-place strategies」라는 기사를 실었다. 1등이 정해진 시장에서 2등이 어떻게 싸우는가를 다룬 기사였고, 아이리버가 그 사례로 등장했다. 제목 그대로 이 회사는 미국에서 1위 자리를 노리지 않았다.
아이리버가 미국에서 1위였다는 말이 지금도 돌아다닌다. 정작 회사는 2004년 8월에 스스로 미국 시장에서 애플과 소니 다음인 3위, 일본에서는 애플 다음인 2위라고 밝혔다. 시장 분석 매체 mobile-review가 적은 미국 최고 점유율도 전체 시장의 13% 정도다. NPD 자료로 2004년 9월 미국 플래시 플레이어 시장은 아이리버가 18.8%를 쥐었고, 같은 시점 하드디스크 플레이어 시장은 애플이 87.3%를 가져갔다. 두 회사는 서로 다른 부문에서 앞섰다.
광고비가 모자라면 소문을 내는 데 힘을 쏟게 된다. 아이리버 아메리카의 마케팅 예산도 대부분 PR과 브랜드 제휴로 흘러갔다고 PRWeek는 전한다. 아이스 큐브와 스눕 독이 제품을 들고 찍힌 사진, 플레이보이 맨션과 CES 노출, 음악 서비스 e뮤직과 손잡고 무료 트랙을 미리 담아 파는 제휴 같은 것들이었다.
PRWeek가 인용한 2003년 점유율은 애플 17%, 아이리버 14%였고, 톰 스탠디지가 엮은 『The Future of Technology』(2005)는 같은 해 세계 시장을 애플 21.6%, 아이리버 14.1%로 적었다. 한쪽은 미국, 다른 쪽은 세계를 잰 숫자로 보인다.
2004년 말에는 미국법인이 성인영화 배우 제나 제임슨을 광고 모델로 세웠다는 소식이 미국 IT 매체에 잇달아 실렸다. 광고에 쓴 제품은 휴대용 미디어 플레이어 PMC-100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일보를 재인용한 MacDailyNews 기사에서 한 업계 관계자는 PMP로 성인물을 보는 사람을 무시할 수 없다며 포르노 배우 기용을 그 고객을 겨냥한 판단으로 봤다. 미국 IT 블로그들은 화제와 조롱을 함께 퍼부었다.
2005년 1월 18일, 아이팟 셔플이 막 풀린 직후였다. 아이리버는 iriver.com 첫 화면에 금발 여성과 흑발 남성 모델이 번갈아 사과를 베어 무는 애니메이션을 걸었다. 애플 로고는 이미 한 입 베어 문 사과다. MacDailyNews 독자들은 거칠게 비판했다. “이 컨셉을 낸 사람은 끝까지 생각해 보지 않았다”, “왜 아이팟 대신 자기 제품을 사야 하는지는 끝내 말하지 못한다… 딱하다.” 블룸버그 비즈니스위크도 이듬해 제나 제임슨 광고를 저급했다고 평하며 판매에 보탬이 되지는 않았으리라고 적었다.
H10, 아이팟 미니를 겨냥하다
2004년 12월 22일 아이리버는 H10을 내놨다. 5GB 하드디스크에 1.5인치 컬러 화면, 원형 휠 대신 세로로 쓸어 올리는 터치패드, 네 가지 색. 값은 36만3000원, 약 344달러였다. 아이팟 미니를 정면으로 겨눈 물건이었다. 하필 그 상대를 고른 것이 문제였다.
문제는 안쪽에서 터졌다. 국내 정리 자료로는 레인콤이 H10에 하드디스크 구매로 200억원, 마케팅으로 100억원을 쏟았다. 그런데 씨게이트에서 받은 하드디스크에 결함이 생기면서 재고가 500억원 규모까지 불어났다고 한다. 회사는 같은 해에 H10을 뺀 하드디스크 주크박스 라인의 개발을 접고 플래시 쪽으로 돌아섰다.
2005년에 내놓은 H10 파생 모델인 주니어와 20GB는 설계를 키우거나 바꿀 여지가 없어 어느 쪽도 원조만큼 팔리지 않았다. 같은 해 아이리버는 U10을 “엄지로 조작하는 물건(the thumb thing)”이라 부르며 밀었다고 코리아타임스는 전했다. 디자인 평가는 좋았지만 용량이 512MB와 1GB에 묶여 있었고 같은 시기 아이팟 나노는 2GB와 4GB였다. 용량을 남보다 먼저 늘려 오던 회사가 정작 용량에서 밀렸다.
승부를 가른 쪽은 아이팟 셔플이었다. 더 레지스터가 NPD와 메릴린치 자료를 인용해 전한 바로는 셔플이 2005년 2월 미국 플래시 플레이어 시장의 43%를, 4월에는 58%를 가져갔다. mobile-review의 정리로는 플래시 부문 세계 1위 자리도 그 무렵 아이리버에서 애플로 넘어갔다. 아이리버는 하드디스크 싸움이 아니라 앞서 있던 플래시 부문에서 졌다.
NPD 기준으로 미국 하드디스크 플레이어 시장에서 아이팟은 2002년 8월 33%, 2004년 8월 82%, 2005년 5월 90%를 쥐었다. 전체 디지털 음악 플레이어 시장으로 넓혀도 2004년 10월 42%에 못 미치던 추정치가 2006년 2분기 75.6%로 올라섰다. 2년 사이에 한 부문의 1위였던 아이팟이 전체 시장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kaori (Flickr) · Wikimedia Commons · CC BY 2.0 · kaori (Flickr) · CC BY 2.0

Yarl · Wikimedia Commons · CC BY-SA 3.0 · Yarl · CC BY-SA 3.0
무너지는 데 걸린 시간
시사저널은 2005년 6월 10일에 「‘MP3 제국’에 해는 지는가」라는 기사를 내놨다. 아이리버의 국내 점유율이 “70%에서 40%대로 떨어졌다”고 이 기사는 썼다. 애플의 국내 점유율은 1월 3%에서 5월 10%로 올랐고 주가는 6만원대에서 1만원대로 주저앉았다는 내용도 함께 실렸다. 제목은 물음표로 끝났지만 본문의 숫자만으로 답은 나와 있었다.
바깥 여건도 나빠졌다. 블룸버그 비즈니스위크는 2006년 5월 기사에서 낸드플래시 부족을 지목했다. 애플이 2005년 8월부터 플래시 물량을 먼저 쓸어 가면서 삼성과 하이닉스, 도시바에서 물량을 받기 어려워졌다는 분석이었다. 같은 기사는 살아남을 길을 둘로 꼽았다. 공급사에 선불을 치러 물량을 묶어 두든가, 샌디스크처럼 자기 공급망을 갖든가였다. 그때의 아이리버에게는 어느 쪽도 쉽지 않았다. 애플은 부품 시장에서도 이기고 있었다. 기기만으로 얻은 우위가 아니었다.
회사는 다른 사업을 찾아 나섰다. 블룸버그는 조선일보를 인용해 레인콤이 휴대용 모바일 게임 쪽으로 전략을 틀고 있다고 전했다. mobile-review가 정리한 목록에는 와이브로 게임기와 DMB PMP, 전자통역기 같은 품목이 줄줄이 올라 있다. 대부분 시제품 단계를 넘지 못했다. 2004년 국내 1위였던 회사는 2006년 무렵 삼성과 코원 아이오디오에 밀려 국내 3위권으로 내려앉았다.
2006년 10월 포브스가 「iPod Killers That Didn't」라는 목록을 실었다. 라이오와 델, 소니, 크리에이티브 사이에 아이리버의 이름이 있었다. 포브스는 이 회사가 이제 한국 안방 시장에 주력하게 됐다고 덧붙였다. 같은 해 mobile-review는 아이리버를 시장 그래프의 기타 항목에서 찾아야 한다고 쓰면서, 몰락의 까닭으로 애플과의 정면 대결을 자초한 지나친 야심을 꼽았다.
‘2009년 창사 이래 첫 적자’라는 문장도 자주 쓰인다. 근거로 인용되는 2011년 머니투데이 기사에는 창사 이래 처음이라는 표현이 없다. 아이리버가 처음 적자를 낸 해는 2005년이다. 그해 1분기에 13억원 순손실로 시작해 2006년까지 내리 적자였다. 연합뉴스 보도로 2005년 한 해 순손실은 355억8000만원, 경향신문이 전한 2006년 2분기 매출은 전년 같은 기간보다 71.4% 줄어든 346억원이었다.
아이리버는 한 차례 흑자를 되찾았다. 2007년에 매출 1696억원과 영업이익 25억원, 2008년에 매출 2068억원과 영업이익 55억원을 냈다. 2009년의 적자는 그래서 첫 번째가 아니라 두 번째다. 스마트폰이 이 카테고리의 기기들을 대체한 뒤로 적자가 13분기 내리 이어졌고, 한때 2000명이 넘던 직원이 100명 아래로 줄었다는 회고가 남아 있다. 회사는 2014년 SK텔레콤에 넘어갔고 2019년에 이름을 드림어스컴퍼니로 바꿨다.
한국이 기억하는 삼각기둥
iFP-100 프리즘은 국내에서 25만원선에 팔렸다. 알루미늄 몸통에 엄지로 굴리는 조그 셔틀을 달았고, 전원은 AA 건전지 한 알로 스무 시간을 버텼다. 상대가 파이어와이어 케이블로 배터리를 채워야 했다면 이쪽은 편의점 건전지 하나면 됐다. 국내 점유율이 절반을 넘던 시절이니 이어폰 줄 끝에 삼각기둥이 매달린 풍경은 흔했다.
레인콤은 2005년 3월 1일 삼일절에 맞춰 신문 광고를 냈다. 엔가젯이 옮긴 취지는 미국 기업들이 전 세계 하드디스크형 MP3 시장을 휩쓸고 있으며 MP3 주권국가로서 가만히 앉아 지켜볼 수 없다는 것이었다고 한다. 애국심에 기대는 광고는 대개 회사 사정을 드러낼 뿐 제품은 설명해 주지 않는다. 미국에서 사과를 베어 물고 국내에서 애국심에 호소하기까지 걸린 시간은 겨우 여섯 주였다. 상대는 느긋했다. 2005년 4월 애플코리아 마케팅 담당 김미루는 셔플 출시와 가격 인하 뒤 한국에서 점유율이 얼마나 올랐는지 가늠할 수 없다고 말했다.
창업자의 그 뒤 이야기도 적어 둔다. 양덕준은 2008년 회사를 떠나 민트패스를 세우고 태블릿형 PMP 민트패드를 냈지만 스마트폰 공세 속에 성장이 멈췄다. 2010년 10월에는 기자 출신 이기형이 쓴 『거인과 싸우는 법 — 벤처신화 아이리버의 끝나지 않은 혁명』이 나왔다. 그리고 2020년 6월 9일, 양덕준은 뇌출혈 투병 끝에 세상을 떠났다. 전자신문은 부고에서 그를 “한국의 스티브 잡스로 불릴 정도로 세계적인 스타기업가 반열에 올랐다”고 적었다.
2025년 12월 아이리버(드림어스컴퍼니)는 SM엔터테인먼트와 함께한 프리즘 프로젝트의 하나로 리메이크판을 내놨다. 64GB에 37g, 최대 24시간 재생, 12만9000원. 옛 유산을 지금의 소비자 경험으로 넓히려는 시도라는 설명이 붙었다. 1mm를 놓고 다투던 삼각기둥이 23년 만에 돌아왔다. 이번에 담는 것은 노래보다 기억 쪽에 가깝다.
IT 기자 최호섭이 아이리버 전성기를 돌아보는 영상.
한 줄 요약
프리즘은 아이리버의 첫 제품이 아니라 첫 플래시 플레이어다. 여러 자료가 첫 제품으로 가리키는 것은 2000년 11월의 CD형 iMP-100이다.
아이팟의 상징인 클릭휠은 2004년 1월 아이팟 미니에서 처음 나왔다. 프리즘이 태어난 2002년은 애플 자료 기준으로 스크롤휠과 터치휠의 시대였다.
2004년이 정점이었다. 매출 4540억원에 영업이익 약 651억원, 국내 1위. 첫 적자는 흔히 알려진 2009년이 아니라 2005년이다.
미국 전체 시장에서 아이리버가 1위였던 적은 없다. 스스로 밝힌 자리는 3위였고 최고 점유율도 전체 시장의 13% 정도로 남아 있다.
mobile-review는 몰락의 까닭으로 애플과의 정면 대결을 자초한 지나친 야심을 꼽았다. 기기가 아니라 싸움의 상대를 고른 방식이 문제였다.
“제품을 만들고 구겨 넣는 것이 디자이너의 역할이 아니라 소비자의 감각을 제품으로 끌어내는 고도로 훈련된 사람” — 김영세(이노디자인 대표), 전자신문 2005년 인터뷰
프리즘은 잘 만든 물건이었고 아이리버는 한동안 진짜로 이기고 있었다. 그런데 이 회사의 패인은 기기 싸움 자체에 있지 않았다. 미국 전체 시장에서 1위였던 적은 한 번도 없었고 스스로 밝힌 자리는 3위였다. 첫 적자도 흔히 알려진 2009년이 아니라 정점 바로 이듬해인 2005년이었다. 아이리버는 싸울 상대를 고르는 방식에서 졌다.
참고 자료
- Apple Presents iPod
- Apple Introduces iPod mini
- 양덕준 별세 관련 보도
- Korea's ReignCom: Moving Up The MP3 Charts
- A Global Brand is Born / IRiver
- Second-place strategies
- Portable digital device maker iRiver bites into Apple (literally) via website
- Apple iPod Shuffle takes 58% of US flash MP3 player market
- iPod Killers That Didn't
- MP3-players – Global markets (Wayback Machine 아카이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