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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IZMORY MAGAZINE

워크맨, 첫 달에는 3,000대만 팔렸다

1979년 여름에 나온 소니 워크맨은 첫 달에 3,000대가 팔렸다. 회사가 직접 적어 둔 이 숫자와 달리 세상에는 처음부터 대박이었다는 이야기가 퍼졌다. 이름을 지은 사람도, 주황색 버튼이 사라진 날짜도 흔히 아는 것과 다르다.

워크맨, 첫 달에는 3,000대만 팔렸다

1979년 7월 1일, 일본 가전 매장에 파란색과 은색이 섞인 작은 상자가 놓였다. 알루미늄 몸체에 무게는 390그램, AA 건전지 두 알로 여덟 시간을 버텼다. 재생 버튼은 있어도 녹음 버튼은 없었고 스피커도 없었다. 소리가 나갈 곳은 헤드폰 잭 두 개뿐이었고 값은 3만 3천 엔이었다.

7월이 끝날 때까지 그 상자는 3,000대쯤 팔렸다. 소니가 회사 공식 역사에 적어 둔 숫자다. 처음 만든 물량이 3만 대였으니 한 달 동안 10분의 1밖에 팔지 못한 셈이다. 영어권에 퍼진 이야기는 정반대다. 한 달에 5,000대를 예상했는데 두 달 만에 5만 대가 나갔다는 문장이고 2009년 타임 기사가 그 대표 격이다. 회사가 첫 달엔 안 팔렸다고 써 뒀는데도 세상은 처음부터 성공한 물건으로 기억한다.

긴자 소니빌딩 'It's a Sony' 전시대에 놓인 1979년형 워크맨 TPS-L2
긴자 소니빌딩 전시장에 놓인 첫 워크맨 TPS-L2

Yoshikazu TAKADA from Tokyo, Japan · Wikimedia Commons · CC BY 2.0

워크맨만큼 자주 인용되면서 워크맨만큼 자주 틀리게 인용되는 물건도 드물다. 팔린 대수도, 이름을 지은 사람도, 미국에 들어간 시점도, 주황색 버튼이 사라진 날짜도 널리 알려진 이야기와 다르다. 이 현상을 처음 이론으로 다듬은 논문조차 첫 문단에서 발매 연도를 틀렸다.

1970년대까지 음악은 어딘가에 앉아서 듣는 것이었고 스피커 앞을 벗어나면 소리도 끊겼다. 들고 다닐 물건이 없지는 않았다. 소니가 1978년에 내놓은 휴대용 스테레오 테이프 리코더 TC-D5는 소니 연혁에 적힌 무게가 1.7킬로그램이고 크기는 문고본만 했다. 들 수는 있어도 들고 다니고 싶을 만큼 가볍지는 않았다.

프레스맨에서 녹음을 덜어내다

그 1.7킬로그램을 가장 자주 든 사람이 소니 공동창업자 이부카 마사루였다. 무거워서 못 쓰겠다는 불평이 회사 기록에 남아 있다. 미국 출장을 앞둔 어느 날 이부카는 오가 노리오에게 이렇게 물었다. “'프레스맨'에 재생만 되는 스테레오 회로를 넣은 것을 만들어 줄 수 없겠나.” 프레스맨은 기자들이 쓰던 모노 카세트 리코더였다. 오가는 이 부탁을 테이프레코더 사업부장 오소네 코조에게 넘겼다. 오소네는 녹음 기능을 들어낸 자리에 스테레오 재생 회로를 넣게 했다.

개조한 기계를 들어 본 이부카는 기뻐했다. “작은데도 소리가 좋지 않으냐. 진짜 좋은 소리를 들으려면 소리를 빠짐없이 잡아내는 헤드폰이 좋은 거야.” 이부카는 그 물건을 해외 출장에 들고 갔고 돌아와 모리타 아키오에게 보여 줬다. 모리타의 반응은 이랬다. “확실히 스피커로 듣는 것과는 다른 맛이 있다. 게다가 들고 다니며 혼자서도 들을 수 있다. 이거 재미있겠는데.”

1979년 2월, 모리타는 설계와 기획, 선전, 디자인을 맡은 젊은 사원들 앞에서 그 개조품을 들어 보였다. 녹음은 빼고 헤드폰까지 묶어 재생 전용기로 내놓으면 팔린다는 것이었다. 조건도 붙였다. 젊은이를 겨냥할 것, 여름방학 전에 내놓을 것, 값은 4만 엔을 넘기지 말 것. 남은 시간은 넉 달이었다.

넉 달이라는 일정이 설계 전체를 정했다. 1호기 설계팀을 이끈 다카시노 시즈오와 오소네는 테이프를 돌리는 장치를 새로 만들지 않기로 했다. 콘셉트를 시험하는 첫 기계가 자주 고장 나면 의심받는 쪽은 기계가 아니라 콘셉트라는 것이 오소네의 생각이었다. 그래서 이미 50만 대를 만들어 본 프레스맨의 장치를 그대로 가져다 썼다. 정작 그 프레스맨이 어느 모델이었는지는 지금도 갈린다. 소니 공식 기록은 번호도 없이 '50만 대 실적의 프레스맨'이라고만 쓴다.

50그램짜리 헤드폰이 붙다

워크맨이 들고 다니는 기기가 되려면 본체 못지않게 헤드폰이 중요했다. 그 무렵 업계에서 쓰던 헤드폰은 무게가 300~400그램이었고 소리를 내는 부품인 드라이버의 지름은 50밀리미터가 넘었다. 390그램짜리 본체에 400그램짜리 헤드폰을 물리면 걸으면서 듣는다는 발상 자체가 무너진다.

같은 회사 다른 부서는 이미 가벼운 헤드폰을 만들고 있었다. 소니 기술연구소의 오픈에어형 시제품은 무게가 50그램, 드라이버 지름이 23밀리미터였다. 업계 표준의 6~8분의 1 무게에 지름은 절반도 되지 않았고 훗날 'H·AIR' 라인으로 이어진다. 두 팀은 서로가 있는 줄도 몰랐다. 둘을 붙인 것은 이부카와 모리타의 '같이 하라'는 한마디였고 두 팀은 1979년 3월에 합류했다.

그 헤드폰이 그대로 TPS-L2에 딸려 나갔다. 헤드폰의 계보는 워크맨보다 길게 이어졌다. 함께 태어난 소형 경량 헤드폰 기술은 1982년 지름 16밀리미터 드라이버를 쓴 세계 최초 인이어 헤드폰으로, 1992년 일반 소비자용 최초의 노이즈캔슬링 모델로, 2017년 완전 무선 모델로 이어진다. 테이프 장치가 박물관 소장품이 된 뒤에도 이어피스는 끊기지 않고 나왔다.

이름은 광고선전부에서 나왔다

이름은 제품보다 먼저 사내 반발을 샀다. 소니 공식 기록에 따르면 '워크맨'을 지은 사람은 엔지니어가 아니라 광고선전부의 젊은 사원이다. 바탕이 된 기종 '프레스맨'과 그때 유행하던 영화 《슈퍼맨》을 붙여 만든 말이었다. 영어권 매체 중에는 오소네 코조가 제안했다고 쓴 곳이 있지만 1차 기록은 다르다. 이름을 지은 사람은 광고선전부 사원이고 모리타는 반대를 무릅쓰고 그 이름을 승인했을 뿐이다.

반대는 문법에서 나왔다. 워크맨은 영어도 아니고 어색하다는 것이었다. 모리타의 답은 짧았다. “쓰는 건 젊은이들이다. 젊은이들이 괜찮다면 됐다.” 값도 비슷하게 정해졌다. '올해가 33주년이니 3만 3천 엔으로 가자'는 모리타의 한마디로 그 자리에서 결정됐다는 일화가 회사 기록에 남아 있다. 이 금액을 '125달러'로 옮긴 영어권 기사가 있는데 1979년 환율로 따지면 약 150달러다.

반대는 이름에만 있지 않았다. 회사 기록에 남은 영업부의 말은 이랬다. “테이프 플레이어라니 들어본 적이 없다. 녹음 기능이 없으니 절대 안 팔린다.” 널리 퍼진 '모리타가 안 팔리면 사퇴하겠다고 선언했다'는 장면은 그 기록 어디에도 없다. 남은 것은 영업부의 반대와 모리타가 자기 직감을 믿었다는 한 줄뿐이다.

이름은 국경을 넘으면서 또 갈라졌다. 일본 발매 반년 뒤 해외 판매가 시작됐는데 현지 판매사들이 워크맨은 영어가 아니라며 이름을 거부했다고 소니 쪽 기록은 전한다. 그래서 미국에서는 '사운드어바웃', 영국에서는 밀항자를 뜻하는 '스토어웨이', 호주에서는 '프리스타일'이 한꺼번에 굴러다녔다. 이번에도 모리타가 정리했고 이름을 하나로 합친다는 선언은 1980년 4월 미국 세일즈 컨벤션에서 나왔다.

잭은 두 개, 버튼은 주황색

케이스를 연 TPS-L2 속 — 나란히 놓인 헤드폰 잭 두 개와 주황색 버튼, 납땜된 기판
뚜껑을 열어 본 TPS-L2의 속 — 나란한 헤드폰 잭 A·B와 주황색 핫라인 버튼

Dave Jones from Australia · Wikimedia Commons · CC BY 2.0

TPS-L2에는 A와 B라는 헤드폰 잭이 두 개 있었고 그 옆에 '핫라인'이라는 주황색 버튼이 붙어 있었다. 헤드폰을 낀 두 사람이 음악을 끄지 않고도 말을 주고받게 해 주는 통화 버튼이다. 뉴욕타임스는 1999년 20주년 기사에서 이 버튼을 '패닉 버튼'이라 부르며 모리타 아키오가 훗날 쓴 글을 인용했다. 소니가 이기적으로 비칠 수 있는 제품을 내놓기를 주저했다는 내용이다.

가장 널리 퍼진 오해는 미국 상품명이 사운드어바웃에서 워크맨으로 바뀌던 1980년 무렵에 주황색 버튼과 두 번째 잭이 함께 사라졌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수집가들이 보관해 온 그 시절 광고를 보면 1980년 미국에서 팔린 TPS-L2는 어느 이름을 달았든 두 기능을 그대로 갖고 있었다. 소니 미국법인 이름으로 나간 1980년 광고는 두 번째 헤드폰 잭과 '독점적인 핫라인 버튼'을 나란히 자랑했다.

본체에서 주황색 버튼이 사라진 것은 1981년 2월에 나온 후속기 '워크맨 II(WM-2)'부터다. 통화 기능 자체가 없어지지는 않았다. 딸려 나온 헤드폰 MDR-4L1S의 줄이 갈라지는 지점에 주황색 음소거 버튼이 달렸고 A·B 두 잭은 본체에 그대로 남았다.

영국 버밍엄 싱크탱크 박물관이 소장한 소니 워크맨 WM-2 본체 — 위쪽에 헤드폰 잭 A·B가 보이고 주황색 버튼은 없다
본체에서 주황색 버튼이 사라진 첫 후속기 — 헤드폰 잭 A·B만 남은 워크맨 WM-2

Birmingham Museums Trust · Wikimedia Commons · CC BY-SA 4.0

통화 기능은 그 뒤 모델에도 남았다. 1981년 WM-3는 은색 통화 버튼과 내장 마이크를 달았고 1982년 WM-R2는 밀어서 쓰는 핫라인을 갖췄다. 두 모델 다 헤드폰 단자가 두 개였다. 계보는 번호 순서와도 어긋난다. WM-1은 이름과 달리 TPS-L2와 WM-2 다음에 나온 세 번째 모델(1981년)이고 잭만 두 개였다.

8월에 첫 3만 대가 다 팔렸다

1979년 6월 22일, 소니는 긴자 소니빌딩에 기자들을 모아 버스에 태웠다. 도착한 곳은 요요기 공원이었다. 브리핑도 사양 설명도 없이 방금 받은 제품의 재생 스위치를 눌러 달라고만 했다. 워크맨 티셔츠를 입은 홍보부 직원과 아르바이트 학생들이 시연을 펼쳤고 제품 설명은 전부 헤드폰 안에서 흘러나왔다. 회사 사람이 나와 설명하는 대목이 없는 신제품 발표회였다.

그렇게 해도 팔리지 않았다. 헤드폰을 끼고 거리를 걷는 행동 자체가 아직 낯설어서 소니 직원들이 직접 거리로 나섰다. 광고선전부와 국내영업부 사원들은 워크맨을 쓰고 야마노테선 열차에 올라 하루 종일 도쿄 순환선을 돌았다. 일요일에는 신주쿠와 긴자의 보행자천국에서 지나가는 사람에게 말을 걸었고 고교와 대학 행사에도 나갔다. 이 활동을 1981년 판촉으로 적은 자료도 있지만 소니 기록은 모두 1979년 발매 전후의 일로 둔다.

분위기가 뒤집힌 것은 7월 후반이다. 소니 기록에 따르면 아이돌 가수들이 워크맨을 쓴 모습이 잡지에 실리면서 흐름이 바뀌었고 8월 말에는 첫 3만 대가 다 나갔다. 그 뒤로도 몇 차례 증산했지만 물건이 없어 못 파는 매장이 잇따르는 상태가 여섯 달 이어졌다. 순환선을 하루 종일 돈 사원들보다 잡지 화보 몇 장이 크게 움직인 셈이다. '첫 두 달에 5만 대'라는 이야기보다 이쪽이 훨씬 재미있다.

Sony Walkman 1981 – Original TV Commercial

발매 2년 뒤 전파를 탄 워크맨 TV 광고 원본

Time Machine TV

걷는 자아, '워크맨 효과'라는 이론

워크맨이 팔리면서 학술 연구도 따라왔다. 1984년 일본 문화연구자 호소카와 슈헤이가 케임브리지대 출판부의 학술지 Popular Music 4권 165~180쪽에 'The Walkman Effect'를 실었다. '워크맨 효과'라는 말이 여기서 나왔다.

호소카와는 워크맨을 기계가 아닌 관계로 봤다. 그가 만든 '무지카 모빌리스(musica mobilis)'는 음원이 주인의 몸에 실려 한 지점에서 다른 지점으로 옮겨 다니는 음악을 가리킨다. 거리 악사와 휴대용 라디오가 그 계보에 있고 워크맨은 그중 한 단계다. 가장 많이 인용되는 문장은 이렇다. “The walkman is neither cause nor effect of that autonomy, neither evokes nor realises it. It is the autonomy, or rather autonomy-of-the-walking-self.”

그런데 이 논문도 발매 시점을 틀렸다. 서두는 워크맨이 '1980년 봄'에 일본에서 처음 만들어져 팔렸다고 적는다. 실제 발매일은 1979년 7월 1일이다. '워크맨 효과'라는 개념을 세운 글이 정작 워크맨이 언제 나왔는지를 1년 가까이 틀리게 적은 채 40년 넘게 인용돼 왔다.

특허는 다른 사람 것이었다

워크맨 이야기에서 가장 불편한 인물은 소니 사람이 아니다. 독일 태생 발명가 안드레아스 파벨은 헤드폰과 벨트, 카세트 플레이어, 앰프를 묶은 개인용 스테레오 '스테레오벨트'를 1977년 유럽에 특허 출원했다. 워크맨보다 2년 빠르다. 독일 특허 DE 2813000 C2는 1982년 4월 8일에 등록됐다. 등록되자 소니가 합의를 시도했다. 영국 인디펜던트가 1996년 독일 언론 보도를 받아 전한 바로는 다툼이 3년을 더 끈 끝에 소니가 15만 마르크를 내며 마무리됐다.

합의는 독일 한 나라에만 해당했고 파벨은 다른 나라에서도 싸움을 이어 갔다. 같은 보도에 따르면 그는 1988년 11월 영국에서 주요 침해자들을 상대로 18건의 영장을 냈고 소니를 상대로 한 소송은 1993년 영국 특허법원까지 갔다. 결말은 자료마다 다르다. 파벨이 소송비용 탓에 파산 상태에 몰렸다는 기록도 있고 영국 법원이 특허를 무효로 했다는 기록도 있다.

인디펜던트에 따르면 1996년 3월 항소심에서 소니는 25년 동안 테이프레코더 크기가 줄어든 과정을 보여 주는 표를 냈다. 파벨은 사진으로만 작아 보일 뿐 실제 치수는 커지고 있었다고 맞섰다. 로드 저스티스 알더스는 소니 손을 들어 줬다. 그때 파벨은 담담하게 말했다. “이게 20년이나 끌 줄은 몰랐다. 처음엔 누군가 1년이면 될 거라고 했는데. 내가 돈키호테처럼 일본 산업을 정복하겠다고 나선 것도 아니었는데.”

주황색 핫라인 버튼과 헤드폰 잭 A·B가 보이는 소니 워크맨 TPS-L2 본체 정면
소니와 파벨이 20년 넘게 다툰 물건 — 주황색 핫라인 버튼과 헤드폰 잭 A·B가 보이는 TPS-L2 본체

Binarysequence · Wikimedia Commons · CC BY-SA 4.0

방향이 다시 바뀐 것은 2003년이다. 파벨이 남은 나라에서도 추가 소송을 예고하자 소니가 합의 쪽으로 돌아섰고 2004년 양측은 비밀유지 조항을 담은 합의에 이르렀다. 합의금은 지금도 공개된 적이 없다. '뉴욕타임스가 1,000만 달러가 넘는다고 보도했다'는 문장이 계속 돌아다니지만 2005년 기사의 실제 표현은 '낮은 8자리 수의 현금 배상과 일부 워크맨 판매 로열티'였다. 파벨 본인은 2014년 인터뷰에서 계약 때문에 말할 수 없다면서도 일부 신문에서 1,000만 달러가 넘었다고 읽었다고 농담처럼 덧붙였다.

4억 대 뒤에 남은 것

소니 공식 기록에 따르면 1호기가 나온 지 40년째인 2019년까지 카세트와 CD, MD, 메모리 방식을 합한 워크맨 누계 판매는 4억 대를 넘었다. '2010년 3월 기준'으로 인용되기도 하지만 기준 시점이 다르다. 타임이 집계한 2009년 30주년 시점의 누계는 2억 대였다.

워크맨이라는 이름은 다른 포맷에도 붙었다. 1983년 최초의 CD 워크맨 D-50이 나왔고 미니디스크와 MP3 워크맨이 뒤를 이었다. 그러나 소니는 자기들만 쓰는 규격 ATRAC을 고집하다 아이팟에 시장을 내줬다. 기능을 덜어내 성공한 회사가 이번에는 자기 규격을 놓지 못해 시장을 잃었다. 미국에 마지막으로 나온 재생 전용 카세트 워크맨은 2002년형 WM-FX290이다.

Walkman History - Discontinued Cassette Walkman! - SGNL

카세트 워크맨을 단종하며 소니가 직접 만든 회고 영상

Sony Electronics

그 사이 TPS-L2는 박물관 소장품이 됐다. 스미스소니언 국립미국사박물관 기록을 보면 1987년에 소니 미국법인이 기증한 물건이다. 이 소장품이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촬영 소품이라는 이야기가 돌지만 기증은 영화보다 27년 앞선다. 영화에서 피터 퀼이 들고 다니는 워크맨이 파란색과 은색의 TPS-L2인 것은 맞다. 감독 제임스 건은 개봉 당시 인터뷰에서 카세트테이프가 어머니와 지구를 잇는 피터 퀼의 유일한 끈이 되도록 정했다고 말했다.

다만 이 영화가 카세트 시장을 되살렸다는 이야기는 나눠 볼 필요가 있다. 널리 인용되는 '미국 카세트 앨범 판매 74% 증가'는 테크스팟이 전한 2015년 7만 4천 개에서 2016년 12만 9천 개로 늘어난 수치다. 같은 보도는 그해 다른 가수들의 카세트 발매도 이유로 든다. 2014년에 개봉한 영화의 효과로 볼 숫자가 아니다. 사운드트랙 'Awesome Mix Vol. 1' 카세트는 2015년과 2016년에 각각 4천 개쯤 팔려 두 해 모두 미국 카세트 판매 1위였다. 소니는 2019년 40주년 기념 제품 NW-A100TPS에 TPS-L2를 본뜬 케이스와 포장, 화면에서 카세트가 돌아가는 애니메이션을 담았다. 영화 기념판으로 소개되곤 하지만 그건 아니다.

숫자가 굳어 가는 방식

워크맨을 둘러싼 잘못된 이야기 대부분은 악의 없이 굳었다. 좋은 이야기가 정확한 이야기보다 옮기기 쉬웠고 한 번 옮겨진 문장은 다음 기사의 근거가 된다. 미국 상륙 시점이 그 본보기다. '1980년 6월에 사운드어바웃이라는 이름으로 처음 미국에 들어왔다'는 이야기가 오래 돌았다. 그러나 빌보드 1979년 12월 8일자 1면은 미국 출시를 '이달'이라고 적었고 1980년 2월 9일자 빌보드는 제품이 '최근 미국 시장에 도입됐다'고 보도한다. 미국 정가는 199.95달러였다.

1980년 1월 17일자 듀크대 학보 The Chronicle 14면 스캔 — 아래쪽 광고란에 소니 TPS-L2 판매 광고
1980년 1월 17일자 듀크대 학보 14면 — 광고란에 실린 소니 'TPS-L2 스테레오 카세트 플레이어' 249달러

The Chronicle · Wikimedia Commons · Public domain

들어온 시점이 달라지면 그때 광고를 읽는 법도 달라진다. 1980년 1월 17일자 듀크대 학보 14면에는 더럼의 한 오디오 매장이 소니 'TPS-L2 스테레오 카세트 플레이어'를 보호 파우치와 AC 어댑터, 충전 배터리팩까지 묶어 249달러에 판다는 광고가 실려 있다. 한동안 이 광고는 정식 출시 전에 실물이 흘러들어온 증거로 읽혔다. 정식 도입이 그보다 앞섰다면 남는 것은 한 소매점의 묶음 가격뿐이다.

광고에 얽힌 이야기도 하나 있다. 1980년 8월 뉴욕 록펠러센터의 롤러스케이터 판촉 행사가 소니 워크맨 캠페인으로 자주 인용되는데 레코드 월드 원문은 이 행사를 파나소닉이 메이시스와 함께 벌인 것으로 적는다. 그 기사에서 파나소닉 제품 역시 'Soundabout'이라 불리니 헷갈릴 만도 하다. 소니가 1980년에 실제로 쓴 문구는 따로 있었다. '거리에 혁명이 일어나고 있다'. 라디오 광고는 음악을 한 소절도 쓰지 않고 손가락 튕기는 소리와 발 구르는 소리, 허밍만으로 그 문장을 읽었다.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의 1988년 배경 장면에 1979년 기기가 나오는 것을 시대착오라 지적하는 글도 있다. 기기가 9년 먼저 나왔으니 오래 쓴 물건으로 보는 편이 자연스럽다.

한국이 워크맨을 만난 방식

1980년대 한국에서 일본산 가전은 수입금지 품목이었다. 워크맨도 정식으로는 들어올 수 없었다. SBS CNBC가 2014년에 전한 관세 당국 인터뷰를 보면 밀수 압수품 목록에서 일제 코끼리 밥솥 다음이 소니 워크맨이었고 해외 거주자가 들여온 물량을 빼면 전부 밀수품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1980년대 말에서 1990년대 초 서울 세운상가에는 밀수된 워크맨의 알맹이만 팔고 나머지는 옵션으로 떼어 파는 관행이 있었다고 한다. 번들 이어폰은 모양만 같은 싸구려로 바뀌었고 '껌전지'라 불린 니켈카드뮴 전지와 충전기는 따로 사야 했다.

국산 대응은 1981년 5월에 나왔다. 삼성전자의 휴대용 카세트 플레이어 '마이마이'로 시판가는 7만 5천 원, 워크맨보다 약 2년 늦었다. 광고 사진 속 헤드폰 모양까지 소니 쪽과 닮아 훗날 국내 언론에서도 '워크맨 짝퉁'으로 회고됐다. 1980년대 초반에는 이런 제품을 만드는 국내 제조사가 25개나 생겨났다가 후반에는 삼성 '마이마이', 금성사 '아하', 대우 '요요'의 3파전으로 정리됐다.

정작 국산 이름들은 원조를 이기지 못했다. 조선일보는 2023년 창간 103주년 기획에서 자사 지면에 실렸던 1983년과 1988년의 소니 '워크맨' 광고를 다시 꺼냈다. 그 시절 음악 감상이 '집에서는 LP, 밖에서는 워크맨'으로 나뉘어 있었고 국산 소형 플레이어도 통칭 '워크맨'으로 불렸다는 회고였다. 마이마이를 사도 워크맨이라 부를 만큼 한국에서는 이 이름이 휴대용 카세트 플레이어 전체를 가리키는 말이 됐다.

  • 1979년 7월 1일 일본 발매, 값은 3만 3천 엔 — 녹음도 스피커도 없는 재생 전용기

  • 소니 공식 기록으로 7월 말까지 3,000대, 처음 만든 3만 대가 다 나간 것은 8월 말이다

  • '워크맨'이라는 이름은 광고선전부의 젊은 사원이 '프레스맨'과 영화 《슈퍼맨》을 붙여 만들었다

  • 주황색 핫라인 버튼은 1981년 WM-2에서 헤드폰 줄로 옮겨 갔고 통화 기능은 1982년 WM-R2까지 남았다

  • 2019년까지 워크맨 누계 판매는 4억 대 — 먼저 특허를 낸 안드레아스 파벨과의 다툼은 2004년 합의로 끝났다

가장 자주 인용되는 기계는 가장 자주 틀리게 인용된다. 그래도 이 390그램짜리 상자가 실제로 한 일만은 아무도 틀릴 수가 없다 — 음악을 걷게 만든 것.

워크맨 TPS-L2는 녹음도 스피커도 없이 재생만 하는 기계였고 소니 공식 기록으로 첫 달 판매는 3,000대였다. 실패처럼 보이던 출발은 잡지에 실린 아이돌 사진 몇 장으로 뒤집혔고 8월 말에는 첫 3만 대가 다 나갔다. 그 이야기가 옮겨 다니는 사이 숫자와 날짜와 이름이 하나씩 어긋난 채 굳었다. 1차 자료로 맞춰 보면 기계가 한 일은 더 또렷해진다. 방 밖에서도 음악을 듣게 만든 공은 부풀릴 필요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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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카세트테이프
  • 모리타 아키오

참고 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