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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IZMORY MAGAZINE

값부터 정하고 만든 게임기, 패미컴과 NES

1986년 가을, 뉴욕타임스 1면이 게임기 시장의 부활을 알렸다. 기사에 실린 그해 예상 판매량은 200만 대, 절정기의 4분의 1이었다. 그 작은 회복의 한가운데 있던 기계는 3년 전 교토에서 성능보다 값을 먼저 정하고 만든 패미컴이다.

값부터 정하고 만든 게임기, 패미컴과 NES

1986년 9월 27일 아침, 뉴욕타임스 1면에 앤드루 폴락의 기사 「VIDEO GAMES, ONCE ZAPPED, IN COMEBACK」이 실렸다. 비디오게임이 돌아왔다는 소식이었다. 그런데 부활을 알리는 지면에 인쇄된 숫자는 초라했다. 제조사들이 그해 미국에서 팔릴 것으로 본 게임기가 200만 대였다. 1982년 절정기에는 800만 대가 넘게 팔렸다.

새 세대가 자란 시장

절정기의 4분의 1. 그 정도가 1986년 미국 게임기 시장에 걸린 기대였다. 매대에 다시 놓인 기계는 미국 회사의 물건이 아니었다. 같은 기사에서 닌텐도 오브 아메리카의 마케팅 부사장 로널드 주디는 첫 유행 때는 없던 아이들이 이제 나이가 찼다고 말했다.

그 기계는 3년 전 교토에서 만들어졌다. 뉴욕타임스 1면까지 오는 길에는 몇 달에 걸쳐 깨졌다 이어진 협상과 전량 회수, 그리고 개명이 있었다. 출발점은 성능이 아닌 값이었다.

값부터 정해 놓고 시작한 개발

닌텐도 사장 야마우치 히로시가 개발 책임자 우에무라 마사유키에게 내린 주문은 우에무라의 회고에 따르면 한 문장이 전부였다. 가정의 TV로 오락실 게임을 즐길 수 있게 만들어라. 사양서도 목표 성능도 없었고 정해진 것은 값뿐이었다. 그 값이 얼마였는지는 자료마다 갈린다. 유로게이머가 옮긴 회고는 부품을 5,000엔 이하로 사들여야 했다는 쪽이고 일본어 위키백과는 본체 값을 1만 엔 이하로 누르라는 지시였다고 쓴다. 어느 쪽이든 성능을 정하고 값을 맞추는 보통의 순서와는 거꾸로였다.

그 값에 커스텀 칩을 만들어 줄 회사가 없었다. 닌텐도는 화면을 그리는 그래픽 칩 PPU를 맡아 줄 업체를 찾아 헤맸고 끝내 해보겠다고 답한 곳은 리코 한 군데뿐이었다.

야마우치가 2년 안에 300만 대를 사주겠다고 보증해 칩값을 끌어내렸다는 이야기가 가장 유명하다. 널리 퍼져 있지만 확정된 사실은 아니다. 출처로 지목되는 자료는 『포켓몬 스토리』 65쪽의 각주 하나다. 야마우치 본인이 그 보증을 패미컴 붐이 만든 전설 같다며 부인했다는 기록도 있지만 그 근거는 개인 팬사이트다.

리코 쪽이 협상에서 느낀 부담은 오래된 일본 팬아카이브에 남아 있다. 리코 상무 아사카와 도시부미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닌텐도 때문에 울었다, 게임기라고는 해도 훌륭한 컴퓨터인데 그 안에 넣을 반도체 칩을 2,000엔 이내로 억제하라고 하니까.

리코에게도 받아들일 이유가 있었다. 일본어 위키백과에 따르면 리코는 1981년 오사카 이케다시에 75억 엔을 들여 세운 커스텀 IC 공장을 채우지 못해 고전하던 참이었고 패미컴 물량이 들어온 뒤에야 반도체 사업부가 4년 만에 흑자로 돌아섰다. 칩 설계도 값이 정했다. 리코가 Z80 대신 MOS 6502 계열이라는 다른 8비트 칩을 제안한 이유는 라이선스 협상이 길어질 위험과 칩 면적이 4분의 1로 줄어 원가에 유리하다는 계산이었다. 그렇게 정해진 리코 2A03은 8비트 칩이고 동작 속도는 1.79MHz였다. 계약이 성사됐을 때 우에무라는 환호하기보다 안도했다고 회고했다. 사장의 결정이었고 자신은 관여하지 않았으니까.

케이스를 연 패미컴 메인보드와 그 위에 놓인 커스텀 칩들
케이스를 열면 나오는 패미컴 메인보드. 기판 가운데에 리코가 만든 커스텀 칩들이 나란히 놓여 있다.

Evan-Amos · Wikimedia Commons · Public domain

붙박은 컨트롤러, 살아남은 십자키

값을 먼저 정한 설계의 대가는 컨트롤러에서 드러났다. 패드 두 개가 본체에 케이블로 붙박여 있어 뽑을 수가 없다. 커넥터에 돈이 들어서였다고 우에무라는 설명했고 훗날 이 결정을 설계에서 아쉬운 대목으로 꼽았다. 커넥터를 빼면 원가는 내려가지만 선이 상하면 기계째 수리를 맡겨야 한다. 반면 2인용은 깎을 수 없는 항목이었다. 패드를 두 개 붙이라고 지시한 사람은 야마우치 본인이다. 1엔 단위로 원가를 깎던 회사가 컨트롤러 하나를 통째로 더 붙인 것이다.

2P 패드에 뚫린 작은 마이크 구멍은 우에무라 본인의 아이디어였다. 당시 일본을 휩쓴 가라오케 붐을 노린 장치였는데 정작 가장 유명해진 쓰임새는 윌 라이트가 만든 『레이드 온 벙겔링 베이』였다. 뜻밖의 역할을 맡은 사람은 또 있다. 훗날 마리오를 만드는 미야모토 시게루가 이 회사에서 처음 맡은 하드웨어 일은 블록 부수기 게임기의 산업 디자인이었다.

이렇게 원가를 깎으면서도 십자 방향키는 남겼다. 리코 2A03과 함께 이 기계를 대표하는 사양으로 꼽힌다. 조이스틱이 차지하던 자리를 엄지 하나 크기로 줄인 이 방향키는 3년 뒤 회색 외관으로 북미에 나갈 때도 그대로였다.

1983년 7월 15일, 그리고 전량 회수

패미컴이 일본 매장에 놓인 날은 1983년 7월 15일로 기록된다. 값은 1만 4,800엔. 붉은 상판에 흰 몸체, 앞면에 카트리지 슬롯 하나, 모델명은 HVC-001이었다. 첫날 함께 놓인 소프트는 동키콩과 동키콩 Jr., 뽀빠이 세 편으로 셋 다 자기네 오락실 기계에서 그대로 옮겨온 것이다.

일본판 패미컴 본체와 본체에 연결된 컨트롤러 두 개
붉은 상판에 흰 몸체, 케이블로 본체에 붙어 있는 패드 두 개. 일본판 패미컴이다.

Evan-Amos · Wikimedia Commons · Public domain

Famicom Commercials (Japanese TV Ads)

그 시절 일본 TV에 나가던 패미컴 광고 모음.

Eternal Blue Media

몇 달 지나지 않아 설계 결함이 드러났다.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개체가 나왔고 원인은 PPU 자체에 있었다. 유로게이머가 전하는 불량률은 약 1%다. 직원들은 문제가 확인된 물건만 골라 바꿔주자는 안을 냈다. 100대 가운데 99대는 멀쩡했다. 야마우치는 그 안을 물리치고 전량 회수를 지시했다.

일본어 위키백과에 따르면 출하 정지는 1983년 하반기부터 적어도 1984년 1월 말까지 이어졌다. 팔 물건이 없는 동안에도 매장에는 재입고를 기다리는 손님이 몰렸다. 앞날을 아무도 모르던 시점에 회사는 몇 달치 판매를 스스로 포기한 셈이다. 우에무라의 회고는 더 구체적이다. 오사카의 큰 아파트 단지에 살던 그에게 이웃 아이들이 찾아와 패미컴이 TV에 안 나온다며 고쳐달라고 했다는 것이다.

몇 달을 끈 아타리 협상

일본에서 기계를 거둬들이던 그해, 닌텐도는 태평양 건너편에서 전혀 다른 문제를 붙들고 있었다. 야마우치가 그린 조건은 흔히 알려진 북미 유통 위탁보다 훨씬 과감했다. 일본은 닌텐도가 맡고 나머지 전 세계는 아타리가 자사 브랜드로 판다는 구상이었다. 1983년 초여름 교토 회의에서 우에무라가 직접 기계를 시연했고 6월 시카고 CES에서 서명이 예정돼 있었다.

게임 역사에서 가장 자주 인용되는 장면이 그 시카고 CES다. 콜레코가 신형 홈컴퓨터 ADAM으로 동키콩을 시연했고 동키콩의 가정용 컴퓨터 판권을 쥔 아타리는 이를 계약 위반으로 봤다. 흔히 알려진 이야기로는 협상이 그 자리에서 깨졌다.

책에 남은 기록은 다르다. 데이비드 셰프의 『Game Over』는 콜레코 소동이 결국 무관했다고 쓰고 스티븐 켄트는 계약이 애초에 체결된 적이 없다고 쓴다. 서명하지 않은 계약이 한자리에서 깨질 수는 없다.

협상은 몇 달 동안 이어졌다. 6월 CES 직후 카사르 측이 아라카와에게 보낸 서한에는 계약 파기뿐 아니라 법적 조치까지 들어 있었다고 셰프는 옮긴다. 한 달 뒤인 7월, 아타리는 CEO 레이 카사르를 해임한다. 9월에는 워너의 매니 제라드 사무실에 아타리와 닌텐도와 콜레코가 다시 모여 동키콩 권리를 절충했다. 그 자리에서 아라카와는 아타리가 정리해고와 거액의 분기 손실로 무너지는 중임을 봤다. 셰프는 협상이 끝난 이유를 콜레코가 아닌 아타리 자신의 붕괴에서 찾는다.

CES 사태 직후 급히 소집된 호텔 회의에 야마우치는 인사도 없이 들어와 콜레코 사장 그린버그를 일본어로 몰아붙였다. 회의가 끝나고 그가 이 협상의 실무를 이끈 하워드 링컨에게 던진 말은 이랬다. Sometimes this is the way you have to handle people, Mr. Lincoln. What did you think about that performance? 격노는 연기였다. 적어도 본인은 그 자리를 퍼포먼스라고 불렀다.

반대편의 증언도 있다. 아타리 엔지니어링 부사장 스티브 브리스토는 2001년 WIRED 인터뷰 기록에서 Regrettably, it was my decision not to license the Nintendo system이라고 말했다. 2600 사업을 계속하겠다는 내부 판단이 결렬의 본질이었다는 뜻이다. 결과만 놓고 보면 닌텐도에게는 다행이었다. 아라카와의 회고는 이렇다. Can you believe that we almost sold the whole thing? If we had, no one outside of Japan would know about Nintendo.

회색 상자로 다시 만든 NES

협상이 끝난 뒤 닌텐도는 직접 팔기로 했다. 미국 소매점은 비디오게임이라면 아예 취급하려 들지 않았다. 그래서 닌텐도는 먼저 홈컴퓨터를 들고 갔다. 1985년 1월 CES에서 내놓은 물건은 어드밴스드 비디오 시스템(AVS)이라는 콘셉트였다. 작은 부스에서 아라카와가 직접 손님을 맞았지만 주문은 붙지 않았고 닌텐도는 콘셉트를 접었다.

다시 설계하면서 손댄 쪽은 성능보다 인상이었다. 카트리지를 위에서 꽂는 대신 앞으로 밀어 넣게 만들어 비디오테이프를 넣는 VCR처럼 보이게 했고 상자는 회색으로 칠했다. 아타리 2600을 떠올리게 하는 요소는 전부 지웠다. 회색 케이스를 그린 사람은 닌텐도 오브 아메리카의 디자이너 랜스 바였다. 이름에서도 비디오게임이 빠졌다. Nintendo Entertainment System. 마케팅 매니저 게일 틸든은 같은 이유로 카트리지를 게임 팩, 본체를 컨트롤 데크라고 불렀다. 게임기가 아닌 척하는 게임기였다.

회색 케이스의 북미판 NES 본체와 컨트롤러 두 개
카트리지를 앞으로 밀어 넣는 회색 상자. 북미판 NES 본체와 컨트롤러다.

Evan-Amos · Wikimedia Commons · Public domain

외관을 바꾸자 새 문제가 따라왔다. 앞으로 밀어 넣는 구조에 맞춰 넣은 72핀 ZIF 커넥터, 그러니까 힘 안 들이고 꽂히게 해 주는 단자는 카트리지가 드나들 때마다 눌려 접점이 상했고 결국 화면이 깜빡였다. 카트리지를 빼서 입으로 후 부는 민간요법이 한 세대에 걸쳐 퍼진 이유가 여기 있다. 향수로 기억되는 그 동작은 마케팅에서 비롯된 문제를 달래는 방법이었다.

그리고 상자 옆에 로봇을 세웠다. 요코이 군페이의 R&D1팀이 만든 R.O.B.는 거실보다 매대를 겨냥한 물건이었다. 1985년 미국 완구업계는 테디 럭스핀과 토미 옴니봇 같은 로봇 친구들로 들끓었고 닌텐도는 그 유행에 올라탔다. 게임기는 거절해도 로봇은 받는 바이어가 있었다. 재퍼 광선총을 묶어 판 이유에 대한 우에무라의 설명은 더 짧다. 미국인들은 총을 좋아하니까. 2015년 뉴욕대 강연에서 나온 말이다.

전시대 위에 놓인 R.O.B. 로봇 실물과 그 뒤의 NES 본체
전시 부스에 놓인 R.O.B. 실물. 뒤로 NES 본체가 보인다.

Chapuisat from España · Wikimedia Commons · CC BY 2.0

뉴욕에서 시작한다

어디서 팔기 시작할지를 두고도 계획이 한 번 더 뒤집혔다. 부사장 브루스 로리의 계획은 작은 도시부터 조용히 시작하는 것이었다. 야마우치는 딸이 통역하는 자리에서 그 계획을 엎었다. 뉴욕에서 시작한다, 그곳이 성공이 일어나는 곳이니까.

1985년 가을 닌텐도 오브 아메리카는 뉴저지 해컨색의 낡은 창고에 작전본부를 차렸다. 약 30명이 스스로를 스왓팀이라 부르며 매장에 전화를 돌렸다. 첫 공식 영업 방문지였던 울워스의 답은 짧았다. 안 만진다. 토이저러스에서는 바이어가 미적거렸지만 수석부사장 하워드 무어가 그래서 내가 수석부사장인 거라며 입점을 밀어붙였다. 멘탈플로스가 옮긴 회고로는 소매점에 넘긴 도매가가 98달러였다.

매대를 얻은 뒤에는 사람을 모아야 했다. 뉴욕 메츠의 무키 윌슨과 론 달링이 매장 시연에 나와 손님들과 『베이스볼』로 맞붙었다. 1985년 10월 18일, NES는 그렇게 딱 한 도시에서만 팔리기 시작했다. 업계지 『Computer Entertainer』 1985년 10월호의 판매점 목록에는 F.A.O. Schwartz도 있다. 다만 흔히 전해지는 5번가 쇼윈도 단독 전시까지 그 목록이 증명하지는 않는다.

초기 출하량은 수만 대 규모로 알려져 있고 그해 크리스마스까지 팔린 대수는 기록이 엇갈린다. 로리는 목표였던 5만 대를 넘겼다고 기억하고 뉴욕타임스가 인용한 숫자는 9만 대인데 정작 마케팅을 맡은 게일 틸든은 그 숫자를 홍보용 과장으로 의심했다. 1986년 2월 로스앤젤레스를 비롯한 큰 도시로 판매가 넓어졌고 북미 전역 출시는 그해 가을에야 이뤄졌다.

가격표에 남은 숫자들

이 기계의 값으로 오래 인용돼 온 숫자는 179.99달러다. 당시 잡지에는 다른 숫자가 남아 있다. 『Computer Entertainer』 1985년 10월호의 「Nintendo On Schedule」은 본체와 컨트롤러 둘, R.O.B.와 『Gyromite』, 재퍼와 『Duck Hunt』가 들어간 뉴욕 출시 세트의 정가를 159.95달러로 밝힌다.

그 딜럭스 세트도 처음부터 고정된 구성은 아니었다. 같은 기사에 따르면 1985년 6월 CES에서 발표된 최초 구성은 더 작았고 10월에 R.O.B.와 재퍼 묶음이 더해졌다. 180달러라는 숫자에 가장 가까운 근거는 출시 전 예상이다. 『The Milwaukee Journal』 1985년 10월 5일자에서 에드워드 J. 셈래드는 전체 패키지가 will sell for under $180이라고 썼다. 상한선을 말한 문장이 언젠가부터 판매가로 굳었다.

실제 매장 광고는 그 아래에서 움직였다. 『Newsday』 1985년 12월 16일자 토이저러스 광고는 139.97달러, 『Daily News』 12월 12일자 The Wiz 광고는 139달러였다. 기본 구성은 JCPenney가 149.99달러, 메이시스가 160달러였다. 그래서 출시 당일의 판매가는 숫자 하나로 못 박기 어렵다. 정가는 159.95달러였고 실제 광고는 매장과 구성에 따라 139달러에서 160달러 사이를 오갔다. 여러 개였던 값은 시간이 지나면 하나로 기억되곤 한다.

마리오, 디스크, 그리고 6,191만 대

소프트웨어가 하드웨어를 판다는 사실을 가장 크게 증명한 게임이 1985년 9월 13일 일본에서 나왔다. 영어 위키백과가 정리한 숫자로 『슈퍼 마리오브라더스』는 발매 첫 달에만 일본에서 약 120만 장이 팔렸고 오리지널 카트리지판의 최종 판매량은 약 4,000만 장이다. 다만 순서를 뒤집어 기억하기 쉽다. 폴리곤 인터뷰에서 우에무라는 마리오가 나오기 전에 이미 패미컴이 일본에서 약 300만 대 팔려 있었다고 회고한다. 마리오는 이미 깔려 있던 패미컴 위에서 크게 성공했다.

닌텐도는 카트리지를 이을 매체로 디스크를 시도했다. 영어·일본어 위키백과에 따르면 1986년 2월 21일에 나온 패미컴 디스크 시스템은 1만 5,000엔이었고 양면 112KB 디스크 카드를 썼다. 완구점에 놓인 디스크 라이터 앞에서 500엔을 내면 갖고 있던 디스크를 다른 게임으로 덮어 써 줬다. 최종 판매량은 약 440만 대로 역대 가장 성공한 콘솔 주변기기로 꼽히고 디스크를 다시 써 주는 서비스는 2003년까지 이어졌다.

패미컴 본체 위에 RAM 어댑터를 꽂고 디스크 드라이브에 올린 구성
패미컴 본체에 검은 RAM 어댑터를 꽂고 그 아래 디스크 드라이브를 받친 모습.

Evan-Amos · Wikimedia Commons · Public domain

이 시절의 소프트웨어에는 나중에 다시 읽히는 이름도 있다. 초대 패미컴과 NES의 『Golf』를 프로그래밍한 사람은 훗날 닌텐도 사장이 되는 이와타 사토루다. 닌텐도 공식 인터뷰에서 시마무라가 그 게임을 꺼내자 이와타는 이렇게 답한다. はい。私がプログラムしてました(笑)。 그때 그는 닌텐도 직원이 아니었다. 1982년경 HAL 연구소에 들어간 외주 개발사 프로그래머였다. 1999년 인터뷰에서 그는 제한된 메모리에 코스 데이터를 넣으려고 압축 방식을 직접 고안했다고 회고했다. 값부터 정한 기계에서는 소프트웨어도 빠듯한 메모리에 맞춰 짜야 했다.

닌텐도는 지금도 투자자용 공식 자료인 IR 자료에 패미컴과 NES를 합쳐 하드웨어 6,191만 대, 소프트웨어 5억 1만 장을 올려두고 있다. 더 이상 갱신되지 않는 숫자다.

컴보이라는 이름

한국에 이 기계가 정식으로 들어온 때는 일본 발매로부터 6년 뒤인 1989년이다. 가정용 게임기라는 물건은 대우전자가 1984년부터 MSX 컴퓨터 규격을 바탕으로 만들어 내놓은 재믹스 계열이 먼저 소개했다. 이름까지 이미 다른 회사가 쓰고 있었다. 게임동아에 따르면 금성은 닌텐도와 무관한 자사 8비트 홈컴퓨터를 금성 패미콤이라는 이름으로 팔았다. 1989년 삼성전자는 세가와 손잡고 겜보이를, 현대전자는 닌텐도와 손잡고 컴보이를 내놨다.

한국에 들어온 물건은 북미판 NES였다. 배경에는 당시의 일본 대중문화 수입 금지 조치가 있었고 이 빗장은 1998년부터 풀리기 시작한다. 회색 상자가 한국에 온 이유는 취향이 아니라 제도였다. 미국 소매점을 설득하려고 바꾼 외관이 태평양을 한 번 더 건너 전혀 다른 이유로 쓸모를 얻었다.

컴보이를 검은색 본체로 기억하는 사람이 많지만 기록에 남은 차이는 본체 색이 아니라 상표 인쇄다. 오리지널 NES가 붉은 글씨로 제품명을 찍은 자리에 컴보이는 검은 글씨로 제 이름을 얹었다. 나무위키에 따르면 모델명은 HGM-2000이고 재퍼는 오렌지색이었으며 본체 바닥 라벨에는 任天堂株式会社라는 한자 상호와 국내 소비자보호센터 전화번호가 찍혀 있었다. 정품임을 따로 증명해야 하는 시장이었다. 값은 13만 9,000원. 게임동아에 따르면 1989년 근로자 평균임금이 월 54만 원이었으니 주급 수준이다. 아이가 조르기에는 부모 일주일치 봉급이었다.

정품이 나왔다고 복제품이 사라지지는 않았다. 해태와 영실업 같은 국내 업체가 만든 패미컴 복제기, 이른바 패미클론은 그 뒤로도 계속 팔렸다. 이름이 남은 것만 해도 키보드를 단 리틀컴2, 거북이 모양의 터틀몬, 가장 많이 팔렸다는 아빠 게임해!, 국내 굿디자인상을 받은 해태전자 슈퍼콤이 있다. 프레시안 칼럼에 따르면 1991년 한 해 국내에서 팔린 게임기 약 115만 대 가운데 60만 대가 복제품이었고 삼성과 현대의 정품은 10만에서 20만 대에 그쳤다.

우회로는 더 있었다. 대우 재믹스나 아이큐2000 같은 MSX 컴퓨터에 꽂으면 패미컴 카트리지가 돌아가는 확장 카드 패밀리 카드가 팔렸고 이를 만든 업체 가운데 하나가 재미나였다. 재미나는 해외 게임을 무단 복제하면서 시작 화면의 제조사 로고를 자사 로고로 갈아 다는 수법으로 악명 높았다. 『슈퍼 마리오브라더스』를 형제의 모험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유통한 것이 대표 사례로 꼽힌다. 4,000만 장이 팔린 게임도 여기서는 다른 이름을 달았다. 이 시절의 중심지로 청계천을 떠올리기 쉽지만 숙명여대 학보에 따르면 세운상가 상인들은 1988년 서울올림픽에 맞춰 용산전자상가로 옮겨갔다. 1989년의 중심은 이미 용산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옛날광고 현대 컴보이

현대 컴보이의 국내 TV 광고. 방영 연도는 분명하지 않다.

옛날TV Intro

광고도 남았다. 흔히 신해철이 컴보이 광고에 출연했다고 이야기하지만 정확히는 얼굴을 비추지 않고 CM송만 랩으로 불렀다. 1993년 광고라는 것까지는 일치하는데 8비트 현대컴보이 쪽인지 16비트 슈퍼컴보이 쪽인지는 출처마다 갈린다. 컴보이라는 이름은 8비트에서 끝나지 않았는데 현대전자는 1992년 10월 16비트 슈퍼컴보이를 약 19만 9,000원에 내놨고 그보다 앞선 1991년 5월에는 휴대용 미니컴보이가 들어왔다. 대기업 라이선스 하나 뒤에 그만큼의 도매상과 복제업자와 잡지가 붙어 있었다.

  • 성능보다 값을 먼저 정하고 만든 기계다 — 커넥터 값을 아끼려고 컨트롤러를 본체에 붙박았다

  • PPU 결함이 드러나자 야마우치는 불량품만 바꿔주자는 안을 물리치고 전량 회수를 택했다

  • 아타리와의 협상은 1983년 6월부터 9월까지 이어지다 끝났고 계약서에 서명한 적은 없다

  • 뉴욕 출시 세트의 정가는 159.95달러, 매장 광고는 139달러에서 160달러 사이였다

  • 패미컴과 NES를 합친 누적 6,191만 대 — 닌텐도 IR에 지금도 그대로 올라 있는 숫자다

값부터 거꾸로 설계된 상자가 산업 하나를 되살렸다. 기적이 아니라, 조용히 어긋난 계약들과 그 사이를 계속 걸어 들어간 사람들이 한 일이다.

값부터 정하고 설계한 1만 4,800엔짜리 패미컴에 불량이 드러나자 닌텐도는 손해를 감수하고 전량 회수를 택했다. 몇 달에 걸친 아타리 협상이 끝난 뒤 닌텐도는 상자를 회색으로 바꿔 뉴욕 한 도시에서 다시 팔기 시작했다. 그 회색 상자는 1989년 컴보이라는 이름으로 한국에도 들어왔다. 패미컴과 NES를 합친 누적 판매량은 끝내 6,191만 대에 이르렀다.

  • 패미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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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닌텐도
  • 아타리
  • 가정용 게임기

참고 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