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돌폰 다이나택 8000X, 전설은 조금씩 어긋났다
790그램에 통화 30분, 값은 3,995달러. 이 숫자들은 40년이 지나도 대체로 그대로인데, 정작 첫 통화의 대사도, 시카고 개통식에서 쓰인 전화기도, 처음 팔린 날짜도 자료마다 조금씩 어긋난다.
1973년 4월 3일, 뉴욕 거리 한복판에서 한 남자가 흰 벽돌 같은 물건을 귀에 대고 서 있었다. 모토로라의 마틴 쿠퍼였고, 수화기 저편은 경쟁 진영의 조엘 엥겔이었다. 무슨 말을 했느냐보다 무엇을 들고 있느냐가 중요한 통화였다. 자동차에 붙박이로 실린 전화가 아니라, 진짜 손에 들고 다니는 셀룰러폰이었다.
그런데 그 유명한 한마디에는 고정된 원문이 없다. 2003년 BBC는 “조엘, 나는 진짜 셀룰러 전화로 당신에게 걸고 있다. 휴대용 핸드헬드 전화기다”로 전했고, 2023년 NPR에서 쿠퍼 본인은 “셀폰으로 걸고 있는데, 진짜 셀폰이다 — 개인용, 핸드헬드, 포터블 셀폰”이라고 다시 말했다. 영문 위키백과에 실린 문장은 또 조금 다르다. 뜻은 같은데 단어가 매번 바뀐다. 같은 NPR 인터뷰에서 그는 한마디를 덧붙였다. “내가 그의 코앞에 우리의 성취를 문질러대는 걸 꺼리지 않았다는 점에 주목하시라.”
다이나택 8000X를 둘러싼 장면은 대체로 이렇다. 기계에 관한 숫자는 40년이 지나도 얼추 맞아떨어지는데 그 바깥의 목격담은 조금씩 다르다. 시카고 개통식에서 쓰인 전화기, 처음 팔린 날, 개발에 든 시간과 돈, 영화 속 소품, 별명의 유래가 하나같이 그렇다.
전화번호가 장소에 붙어 있던 시절
1970년대 초까지 ‘이동전화’는 사실상 자동차의 부속품이었다. 트렁크에 장비를 싣고 지붕에 안테나를 세우고 전원은 차 배터리에서 끌어다 썼다. 전화번호는 사람이 아닌 장소에, 집이나 사무실이나 잘해야 자동차에 붙어 있었다. 걷는 사람과 서 있는 사람은 통째로 통신의 사각지대였다. 쿠퍼의 1973년 통화에도 기반 시설은 필요했다. 영문 위키백과의 마틴 쿠퍼 항목에 따르면 그 신호도 벌링턴 하우스 옥상의 기지국을 거쳐 AT&T 유선망으로 빠져나갔다.
업계 주류도 자동차를 중심에 놓고 개발하고 있었다. 영문 위키백과의 AMPS 항목에 따르면 벨연구소가 1968년부터 1983년까지 표준을 만들고 단말기 설계와 제조는 모토로라를 비롯한 다른 기업들이 맡았다. 같은 항목은 1977~78년경 시카고에서 약 100대 규모의 장비 시험과 2,000명 규모의 유료 서비스 시험이 있었다고도 전한다.
쿠퍼의 전제는 달랐다. 2003년 BBC 인터뷰에서 그는 사람들이 원하는 건 자동차와의 통화가 아니라 사람과의 통화라고 믿었다고 말했다. 모토로라 공식 헤리티지 페이지가 인용한 그의 다른 문장은 훨씬 실용적이다. “차를 세우고 내리면 당신의 모바일은 쓸 수 없지만, 포터블은 들고 갈 수 있다.” 10년에 걸친 지출을 뒷받침한 근거가 이 한 줄이었다.

Rico Shen · Wikimedia Commons · CC BY-SA 3.0
6주라는 기한, 13주라는 증언
모토로라 공식 헤리티지 페이지는 그 시작을 이렇게 적는다. “6주 뒤 FCC 회의에 가져갈 작동 시제품을 만들려면 며칠 안에 3차원 모형이 나와야 했다.” 문장을 그대로 읽으면 6주는 개발 기간이 아니라 회의 날짜다. 마감을 먼저 정해 놓고 물건을 만든 셈인데, 이 순서가 훗날 ‘6주 만에 휴대전화를 만들었다’는 전설로 굳었다.
산업디자이너 루디 크롤롭은 2003년 3월 CNN 인터뷰에서 “처음에 우리에게 주어진 건 6주뿐이었다”고 말했다. 같은 방송 속기록 뒤쪽에는 “그리고 6주 만에 작동하는 유닛을 갖게 됐다”는 문장도 나온다. 와이어드 인터뷰에서 그는 회사 안에서 모형을 처음 공개하던 순간을 “모형 위의 천을 걷어냈더니 모두의 턱이 떨어졌다”고 떠올렸다.
다만 같은 일을 다르게 적은 기록이 여럿이다. 로이터와 와이어드의 취재는 6~8주로 잡았고, Daily Herald가 원개발팀을 모아 놓고 한 인터뷰는 제목부터 ‘약 13주’였다. 6주라는 기한이 있었고 실제 제작에는 그보다 더 걸렸을 가능성이 크다고 보는 쪽이 자료에 맞는다.
바이스로 눌러 담은 회로
크롤롭은 손에 맞는 크기부터 못 박았다. 폭은 2인치를 넘기지 않는다, 부품이 안 들어가면 옆이 아니라 두께로 늘린다. 그래서 다이나택은 넓적해지는 대신 길고 두꺼워졌다. 쿠퍼는 2023년 NPR 인터뷰에서 1973년 시제품을 “결국 2.5파운드가 됐다. 높이 10인치, 폭 1.5인치, 깊이 3인치. 벽돌 같았다”고 떠올렸다. 벽돌이라는 별명은 이 제약이 만든 모양에서 나왔다.
그 안에 부품을 채우는 일이 더 어려웠다. 빌 덤키의 회고에 따르면 짐 듀란테는 주파수를 만드는 국부발진 회로를 작은 상자에 넣으려고 회로를 입체로 쌓아 올린 뒤 바이스(죔쇠)로 눌러 납작하게 만들었다. 합선이 나면 가는 탐침과 핀셋으로 전선을 벌리고 다시 눌렀다. 그것도 세 방향으로 되풀이했다. 안테나 사정도 비슷했다. 돈 린더는 앨 데이비드슨이 만든 안테나를 두고 “서너 개를 만들었다. 다 똑같이 작동해야 했는데 그러지 않았다. 나는 제일 잘 되는 걸 골랐다”고 말했다.
시험 장비까지 손으로 만들었다. 기지국 송신기를 흉내 낼 안테나가 필요해지자 아마추어 무선사였던 덤키는 “즉시 옷걸이 그라운드 플레인 안테나를 떠올렸고, 주석 도금 버스선과 동축 커넥터로 하나 만들어 줬다”고 했다. 피닉스에서 집적회로 두 개를 맡은 론 치슬락의 기억은 더 건조하다. “해가 뜰 때까지 일하고, 집에 가서 두어 시간 자고, 다시 나와서 처음부터 반복했다.” 그는 “조금만 더 통찰이 있었더라면 모토로라 주식을 샀을 텐데, 아주 많이”라고 덧붙였다.
색을 놓고는 두 사람이 부딪쳤다. 모토로라가 늘 쓰던 베이지를 원한 쪽은 존 미첼이었고 흰색을 밀어붙인 쪽은 크롤롭이었다. “이걸 무거워 보이게 만드는 건 우리가 가장 원치 않는 일이었다. 그래서 밝은 색이 필요했다”는 문장은 종종 미첼의 말로 인용되지만 크롤롭의 것이다. 쿠퍼는 훗날 “존은 모든 일에 의견이 있었고 거의 언제나 옳았지만, 때로는 누군가 물러서지 않고 버텨야 하는 순간도 있었다”고 정리했다.

Avicente05 · Wikimedia Commons · CC BY-SA 4.0
10년에 1억 달러, 매출은 없었다
모토로라 공식 기록에 따르면 FCC는 1983년 9월 21일 다이나택 8000X에 형식승인, 그러니까 팔아도 좋다는 허가를 내줬다. ‘세계 최초의 상용 휴대형 셀룰러폰’, 곧 실제로 시장에 내놓고 판 첫 제품이라는 문구가 여기서 나온다. 모토로라 1983년 연차보고서의 표현은 훨씬 사무적이다. “형식승인을 받은 최초의 셀룰러 포터블 전화기. 출하는 1984년에 시작된다.” 승인은 1983년, 물건이 나간 건 이듬해였다.
그 승인 항목 옆에는 “10년과 1억 달러 이상의 투자 끝에”라는 문구가 붙어 있다. 그런데 기간은 자료마다 어긋난다. 모바일폰뮤지엄은 같은 성취를 쿠퍼·크롤롭·미첼 아래 엔지니어들의 ‘15년 작업’이라 부르고, 네이버 지식백과는 “다이나택 개발에만 무려 15년이라는 시간과 100만 달러의 예산을 투자한 것이다”라고 쓴다. 금액의 단위가 100배 어긋난 채로.
쿠퍼 본인의 증언도 하나가 아니다. 2011년 PCMag 인터뷰에서는 “모토로라는 1983년부터 1993년까지 매출이 전혀 없는 제품에 1억 달러를 썼다”고 했고, 2023년 Data Center Dynamics 인터뷰에서는 “1969년에서 1983년 사이에 1억 달러 이상을 썼다”고 했다. 금액은 늘 1억 달러인데 그 돈을 쓴 기간은 10년이었다가 1983~1993년이었다가 1969~1983년이 된다.
그래서 자주 따라붙는 결론 하나는 떼어내야 한다. ‘20년간 1억 달러를 쓴 끝에 흑자로 돌아섰다’는 이야기가 오래 돌아다녔지만, 근거로 달린 PCMag 원문은 시작 연도부터 1983년이고, 흑자 전환이 아니라 매출이 없었다고 말할 뿐이다. 정작 승인 직후 잡지들은 훨씬 들떠 있었다. Popular Science 1983년 10월호는 모토로라 사무실에서 시연받은 물건을 “서류가방이나 여성용 핸드백에 들어갈 만큼 작은 놀라운 휴대전화”라고 적었다.

GS200 · Wikimedia Commons · CC BY-SA 3.0
1983년 10월 13일, 솔저필드
서비스는 시카고에서 먼저 열렸다. 아메리텍은 1983년 6월 FCC에 일반 가입자를 받는 망으로 바꾸겠다고 신청했고, 서비스 구역은 레이크포리스트에서 제네바와 비처까지 2,500제곱마일이었다. 승인은 10월 6일, 개통은 정확히 일주일 뒤인 10월 13일이었다. 이튿날 워싱턴포스트는 “미국 최초의 상용 셀룰러 이동전화 서비스가 어제 시카고에서 아메리텍 모바일 커뮤니케이션스에 의해 개시됐다”고 보도했다.
개통식은 기념식보다 경주에 가까웠다. 참가자들은 솔저필드 주차장에 차를 대고 그 옆에 섰고, 기술자들은 50야드 달리기 출발선처럼 늘어섰다. 신호가 떨어지면 기술자가 주차장을 가로질러 달려가 트렁크의 송수신기에 개통용 부품을 꽂고, 그제야 차주가 전화를 걸었다. 참가 차량은 기록마다 14대와 15대로 갈린다. 그날을 지켜본 사람은 “햇빛은 있지만 춥고 매서운 날”로 기억했다.
우승자는 데이비드 메일란이었다. 그의 기술자 제프 베누치는 표시등이 모두 깜박임을 멈출 때까지 기다렸다 걸라고 일러 줬다. 너무 일찍 누르면 시스템이 초기화될 수 있었다. 하필 그날은 메일란의 생일이었고, 그가 받은 건 장비와 설치비 명목의 2,809달러짜리 대형 수표였다. 정작 본인은 40주년 인터뷰에서 “이겨서 신났다. 무슨 말을 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다.
이 장면에서 가장 자주 어긋나는 것이 기종이다. 그날의 첫 통화가 다이나택으로 걸렸다고 흔히 전해지지만, 당사자 메일란은 WBBM 40주년 인터뷰에서 자신의 역사적 전화기를 ‘Oki Model CS-1’이라고 밝혔고 현장 기술자의 회고도 차량에 설치된 오키 단말을 가리킨다. 8000X는 9월 21일 형식승인을 받았을 뿐 출하는 이듬해였으니, 그날 솔저필드에서 쓸 8000X는 아직 나오지도 않았다.
같은 날의 또 다른 장면도 기록이 엇갈린다. 밥 바넷이 독일로 건 통화의 상대가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의 어느 후손이었는지는 자료마다 다르다. WBBM과 포브스는 손녀라 하고, 시카고 트리뷴은 손주로, 라두스키의 기고와 매셔블은 증손자로 기록한다. 정작 바넷 본인의 전망은 꽤 정확했다. 그해 11월 8일 CBS 방송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기술은 자동차 안의 전화에서 서류가방 속의 전화로, 마침내 주머니 속의 전화로 갈 거라고 나는 말하곤 한다.”
자료마다 다른 가격표
가장 널리 쓰이는 제원은 이렇다. 무게 790그램, 한 번 충전으로 통화 약 30분, 완충에 약 10시간, 1984년 출시가 3,995달러. 모바일폰뮤지엄은 이 값을 2023년 기준 약 11,500달러, 9,300파운드로 바꿔 놓는다. 기기값이 끝도 아니었다. 스미소니언 전시 설명에 따르면 초기 셀룰러 요금은 월 약 50달러에 피크타임 분당 40센트, 비피크 분당 24센트였다.
당시 지면에 실린 숫자도 서로 맞지 않는다. Popular Mechanics 1984년 8월호는 92쪽에서 “28온스짜리 8000X는 세계에서 가장 작은 이동전화”라고 소개해 놓고, 같은 호 115쪽에서는 “회사는 가격을 3,145달러로 책정했다”고 적었다. Fortune은 1984년 8월 6일자에서 “지금 살 수 있는 유일한 워크어라운드 셀룰러폰은 모토로라 제품이고 4,000달러가 넘는다”고 썼다.
쿠퍼 본인은 2003년 회고에서 출시가를 3,500달러라고 말했지만, 여러 독립 자료는 3,995~4,000달러 구간을 되풀이해 확인한다. 무게는 차이가 더 크다. 쿠퍼가 2003년에 말한 16온스부터 스미소니언 소장품 설명의 2.5파운드까지 자료마다 제각각이다. 같은 스미소니언 설명은 충전해 쓰는 니켈-카드뮴 배터리를 본체 뒷면에 떼었다 붙였다 할 수 있는 구조였다고 밝힌다. 그 무게의 상당 부분이 배터리였다.
‘1984년 3월 13일 최초 판매’라는 날짜도 자주 인용되지만 당시 기록 같은 1차 근거가 없다. 이 날짜를 적은 매셔블은 같은 기사에서 첫 구매자가 누구였는지 모른다고 스스로 밝히고, 같은 날짜를 적은 독일 박물관 소장품 페이지는 1984년 7월 초에 만들어진 개체를 ‘판매 개시 약 두 달 뒤 생산분’이라 설명해 앞뒤가 어긋난다. 분명한 건 소매 판매가 1984년에 시작됐다는 사실뿐이다.
슈폰, 벽돌, 그리고 해변의 소품
별명부터 바로잡자. 개발팀 안에서 이 물건은 ‘슈폰(shoe phone)’으로 불렸는데, 흔히 알려진 것처럼 부츠를 닮은 생김새 때문이 아니었다. 원개발팀의 빌 덤키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 중 상당수는 다이나택을 슈폰이라고 불렀다. TV 코미디 《겟 스마트》에서 맥스웰 스마트가 쓰던 구두 전화기를 따서. 달리 뭐라고 부르겠나? 전에 아무도 이런 걸 만든 적이 없었는데.”
대중이 붙인 별명은 ‘벽돌’로 굳었다. 정작 다이나택이 가장 상징처럼 쓰인 곳은 미국 밖이었다. 모바일폰뮤지엄은 8000X가 영국에서 여피, 그러니까 젊은 고소득 전문직의 상징이 된 배경을 ‘런던의 고임금 직종에서 새로 부를 쥔 사람들’이라고 짚는다. 남아 있는 개체 중에는 초기 British Telecom 배지가 붙은 것도 있어, 영국 통신사가 제 이름을 붙여 팔았다는 실물 증거로 꼽힌다.

Redrum0486 · Wikimedia Commons · CC BY-SA 3.0
영화 쪽 장면 하나는 아직 매듭이 지어지지 않았다. 《월스트리트》(1987)에서 고든 게코가 해변에서 쓰는 전화는 흔히 다이나택 8000X로 알려져 있지만, 기종을 못 박는 곳은 멘털플로스 정도이고 레트로우는 ‘8000X 또는 8000S’라고만 적는다. 그 장면이 이 기기의 이미지를 완성해 준 건 분명한데 화면 속 물건의 정체는 여전히 흐릿하다.
그사이 가입 신청도 늘었다. 개통 뒤 첫 일주일 동안 4,000~5,000명이 서비스를 신청했는데, 개통을 마친 가입자가 아니라 신청 건수다. 미국의 셀룰러 가입자는 1990년 500만 명이 된다.
8000X 이후
다이나택의 후속으로 꼽히는 마이크로택은 1989년 4월 25일에 나와 초기 판매가가 2,495~3,495달러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가장 작고 가벼운 전화기이자 접는 모양을 대중화한 제품이라는 평가가 따라붙는다. 《Icons of Design: The 20th Century》의 마이크로택 항목은 크롤롭·나겔레·소렌을 공동 디자인 크레딧으로 올린다. 다이나택을 그린 크롤롭이 접는 후속 기종에도 이름을 올린 셈이다.
프로그램을 이끈 인물로는 1960년부터 모토로라 이동통신 부문의 책임 엔지니어였던 존 F. 미첼이 꼽힌다. 1983년 시카고 개통을 두고 벨연구소의 리처드 프렌키엘은 “진짜 승리였다, 대단한 돌파구였다”고 평했다고 전해진다. 10년 동안 반대편에 있던 벨연구소 쪽에서 나온 말이다.
아날로그 방식 자체의 수명은 뜻밖에 길었다. 모바일폰뮤지엄 기록에 따르면 2007년 6월 캐나다 로저스 와이어리스가 아날로그를 끄기 직전, 정식 망에서 걸린 마지막 다이나택 통화의 주인공은 코스타 치리오타키스다. 1984년에 팔린 다이나택이 2007년까지 현역으로 쓰인 셈이다.
한국에는 카폰이 먼저 왔다
한국의 순서는 미국과 반대였다. 손에 들고 쓰는 전화보다 자동차 전화가 먼저 들어왔다. 1982년 3월 체신부는 이동전화시스템 도입 세미나를 열어 모토로라·AT&T·NEC 등 해외 개발사를 불러 모았다. SK텔레콤 40년사에 따르면 같은 해 10월 정부는 《이동무선전화현대화계획》을 내놓으며 AMPS 방식을 쓰기로 정했고, ‘이미 정부기관에서 운용중인 기종과 같은 저렴한 가격의 모토로라’를 골랐다.
한국이동통신서비스㈜는 1984년 3월 29일 출범해 5월 1일 문을 열었고, 5월 7일부터 차량전화 개통 업무를 봤다. 매일경제는 그해 3월 26일 “오는 4월부터 처음으로 차량용 자동전화(카폰)가 일반에게 선보인다”며 서울·안양·수원·성남에 3천 대를 보급한다는 계획을 전했지만, 실제 개통은 한 달 넘게 밀렸다.
가격은 지금 보면 비현실적이다. 1984년 카폰에 가입하려면 설비비와 채권, 각종 수수료에 단말기 값까지 합쳐 400만원이 넘게 들었다. 매일경제 기준으로 가입비 13만9,400원과 설비비 88만6,000원을 포함한 총액이 408만5,000원이었다. 서울생활사박물관은 이 금액을 1982년형 현대 포니2(347만원)와 나란히 놓고 카폰이 자동차보다 비쌌다고 소개한다. 초기 카폰은 4kg이나 나갔고, 안테나를 필요 이상으로 길게 빼 부를 과시하기도 했다는 회고도 있다. 가입도 하지 않은 채 정비공장에서 안테나만 다는 ‘가짜 카폰’까지 나왔다.
1984년의 카폰을 흔히 모토로라 제품으로 기억하지만 단말기 쪽은 달랐다. 한국이동통신은 영업 개시 보름 전인 4월 18일 금성전기·대영전기산업·현대전자산업·동양정밀공업 등 국내 4개 제조사와 첫 업무협의를 시작했다. 모토로라의 몫은 망 설비였다. 서비스는 한 달 만에 가입자 2,000명을 넘겨 1984년 말 누적 2,658명에 닿았다. 가입자 1만 명 돌파는 1987년 12월 5일, 개시 3년 7개월 만이었다.
1988년 7월 1일, 그리고 오래된 오해

Umut Çolak · Wikimedia Commons · Public domain
핸드헬드의 차례는 1988년에 왔다. 체신부는 6월 7일 한국이동통신이 낸 ‘휴대전화 설치 및 요금안’을 승인했고, 서울올림픽 개막 두 달 전인 7월 1일 국내 최초의 휴대형 이동전화 서비스가 시작됐다. 그날 살 수 있던 단말기는 딱 한 종류, 한진전자가 수입한 영국 테크노폰 제품이었다. 수입 시판가 280만9,400원에 무게 530g이었다.
모토로라가 들어온 건 그해 8월 말이다. 한국모토로라는 유니텍시스템을 총판으로 삼아 ‘두 번째 휴대전화’를 260만~270만원대에 풀었다. 1988년부터 1990년까지 국내 시장은 한진전자와 유니텍시스템 같은 수입·판매 업체가 이끌었고, 국내 업체의 대량생산은 1991년에야 시작된다.
그런데 2005년부터 2026년까지 국내 기사들은 한결같이 그해의 첫 휴대전화를 ‘모토로라 다이나택 8000’이라 부른다. 대신 숫자가 제각각이다. 가격은 240만원과 400만원이, 무게는 771g과 1.3kg이 나란히 돌아다닌다. SK텔레콤 30주년 보도자료(2018)는 “무게가 771g인 국내 첫 휴대전화는 이른바 벽돌폰이었다. 가격은 약 400만원”이라 적었고, 2026년 9월 기사에도 ‘127×228×45mm, 1.3kg, 240만원’ 조합이 그대로 반복된다. 같은 기기를 말하면서 무게가 두 배 가까이 벌어지는 건 대개 실물을 본 적 없이 쓰인 기사들이 서로의 문장을 베낀 결과다.
국내에서 실물로 남아 있는 모토로라 다이나택은 따로 있다. 서울생활사박물관이 소장한 차량용 ‘다이나택 3000T’로, 1988년 유니텍시스템스와 삼광기전을 통해 팔렸다고 적혀 있다. ‘1988년 400만원대 다이나택’은 1984년 카폰의 총 가입비용과 1988년 핸드헬드의 초고가 이미지가 섞인 결과로 보인다. 손에 드는 8000X가 한국에 정식으로 유통됐다고 뒷받침할 1차 근거는 아직 나오지 않았다.
모토로라와의 계약에도 문제가 있었다. SK텔레콤 40년사는 경쟁 없이 맺은 단독 계약에서 약속한 소프트웨어 기술이전이 지켜지지 않고 매년 일방적인 가격 인상이 이어져 대통령 지시까지 내려졌다고 기록한다. 같은 기록에 따르면 1989년 8월 1일 국제경쟁입찰에서 AT&T의 APX-1000이 뽑히며 모토로라의 국내 셀룰러 인프라 단독 공급도 끝났다. 그리고 1992년, 휴대전화 186,630대가 차량전화 85,238대를 두 배 이상 앞질렀다. 다이나택이 미국에서 시작한 전환이 8년쯤 늦게 한국에서도 일어난 셈이다. 1984년 말 2,658명이던 가입자는 1996년 말 289만 명이 된다.
8000X가 나오면서 달라진 건 휴대성 자체가 아니었다. 카폰도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 다이나택은 장소에 붙어 있던 번호를 사람에게 붙일 수 있다는 생각을 물건으로 옮겼고, 뒤에 나온 모든 전화기가 그 결정을 다듬어 왔다.
1973년 4월 3일 뉴욕에서 걸린 첫 핸드헬드 셀룰러 통화의 대사는 판본마다 다르다
모토로라 공식 기록은 1983년 9월 21일 형식승인까지 10년과 1억 달러 이상이 들었다고 적는다
790그램·통화 30분·완충 10시간·3,995달러가 가장 널리 쓰이는 제원이다
1983년 10월 13일 시카고 개통식에서 처음 걸린 전화의 단말은 다이나택이 아니었다
1988년 국내 휴대전화 서비스 첫날 살 수 있던 단말은 한진전자가 수입한 영국 테크노폰이었다
“우리는 사람들이 자동차와 통화하고 싶어 하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과 통화하고 싶어 한다고 믿었다 — 장소가 아니라, 책상이 아니라, 집이 아니라 사람에게 붙는 번호를.” — 마틴 쿠퍼, 2003년 BBC 인터뷰
다이나택 8000X는 잘 만든 전화기가 아니었다. 790그램을 들고 30분쯤 통화하면 배터리가 바닥났다. 대신 번호를 장소가 아닌 사람에게 붙이자는 옳은 질문을 실물로 옮겼다. 기계의 숫자보다 그 뒤에 붙은 전설이 훨씬 부정확했다.
참고 자료
- Cell Phone Development — Explore Motorola Heritage
- Motorola — DynaTAC 8000X
- 50 years ago, Martin Cooper made the first cell phone call
- They changed the world — in about 13 weeks: From the brick to the RAZR
- First cellular call, 40 years later(Chicago Tribune 원문, Courier-News 재게재)
- Chicagoan has distinction of making first cell phone call
- Phones on the Go, Popular Mechanics 1984년 8월호 115쪽(Google Books 스캔)
- SK텔레콤 40년사
- 이동전화 30년 특집 — 1988년 휴대전화 도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