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믹스, 키보드를 뺀 MSX 게임기
대우전자는 MSX 컴퓨터에서 키보드를 빼고 카트리지로 즐기는 게임기를 만들었다. 그렇게 나온 재믹스는 회사가 게임기를 접은 뒤에도 팬들의 손에서 세 번 다시 만들어졌다.
분홍과 흰색 플라스틱으로 만든 재믹스 위에는 카트리지를 넣는 덮개가 있다. 그 아래에는 zemmix 로고가 붙어 있다. 아이가 할 일은 덮개를 열고 카트리지를 밀어 넣는 것이었다.
재믹스의 바탕은 1983년에 나온 가정용 컴퓨터 표준 MSX였다. 대우전자는 여기서 키보드를 빼고 게임에 필요한 부분을 남겼다. 컴퓨터를 다루는 법부터 익힐 필요 없이 카트리지로 게임을 즐기게 하려는 선택이었다.
여러 회사가 함께 쓰던 컴퓨터 규격
1983년 니시 카즈히코와 아스키가 발표한 MSX는 여러 회사가 함께 쓰는 가정용 컴퓨터 규격이었다. 미국 스펙트라비디오의 SV-328을 본보기로 삼았으며 그 기계에는 키보드가 달려 있었다.
MSX는 제조사가 달라도 같은 프로그램을 쓰자는 생각에서 나왔다. 회사마다 본체 모양은 달리해도 카트리지를 꽂는 슬롯과 기본 사양은 맞추는 방식이다. 훗날 한 회사가 정한 카트리지 규칙을 따르던 게임기와는 출발부터 달랐다. 게임은 MSX 컴퓨터로 할 수 있는 일 가운데 하나였다.
대우전자도 MSX 규격에 맞춰 IQ·DPC·CPC 계열 컴퓨터를 만들었다. 이 컴퓨터들은 뒤에 Talent, Yeno, Dynadata라는 이름으로 해외에서도 팔렸다. 그와 달리 재믹스는 키보드를 없애고 게임기로 만든 제품의 이름이다.
카트리지와 조이스틱만으로
대표 모델인 CPC-50은 MSX1을 바탕으로 만든 카트리지 전용 게임기다. 본체에는 키보드가 없어서 컴퓨터처럼 글자를 입력하며 쓰는 물건과는 거리가 멀었다. 대우전자는 거실 텔레비전 앞에서 카트리지를 꽂고 게임을 즐기도록 구성을 단순하게 바꿨다.
조이스틱까지 본체에 붙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일부 카탈로그에는 조이스틱 내장으로 소개되지만 실제로는 CPJ-902 조이스틱을 본체와 함께 넣어 팔았다. 손에 쥐는 스틱과 게임기 본체는 따로 떨어진 물건이었다.

Moon Grinder 28 · Wikimedia Commons · CC BY-SA 4.0 · Moon Grinder 28 · CC BY-SA 4.0
키보드로 프로그램을 짜는 과정 대신 카트리지를 꽂는 동작만 남자 아이에게 이 상자는 게임기가 됐다. 긴 설명서도 필요 없었다.
MSX 로고가 빠진 까닭
재믹스를 두고는 오래 떠도는 이야기가 둘 있다. 대우가 IQ-1000용 D램 메모리 재고를 쓰려고 만들었다는 설이 하나다. 다른 하나는 아스키의 허가 없이 팔다가 슈퍼V부터 정식 사용 계약을 맺었다는 설이다.
둘 다 위키에서 자주 만나는 이야기지만 대우전자나 아스키의 문서로 뒷받침되지 않는다. D램 재고 이야기는 1차 자료도, 서로 뒷받침하는 2차 자료도 없고 무허가에서 정식 계약으로 이어졌다는 이야기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이를 재믹스의 탄생 과정으로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MSX.org는 본체에 MSX 로고가 없는 까닭을 키보드에서 찾는다. 키보드가 없어 완전한 MSX 컴퓨터로 볼 수 없었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그래서 재믹스를 키보드 없는 숨은 MSX라고 부른다. 로고가 빠졌다는 사실만으로 무허가 제품이었다고 판단할 수는 없다.
이 설명대로라면 게임기로 쓰기 위해 없앤 키보드가 로고에도 영향을 준 셈이다. 재고떨이 이야기만큼 극적이지는 않아도 컴퓨터와 게임기 사이에 있던 재믹스의 모습을 잘 보여 준다.
재미있다는 이름
Zemmix는 '재미있다'와 MSX를 합친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MSX.org도 이름의 뜻을 It's Fun으로 풀어 설명한다. 컴퓨터의 복잡한 기능을 덜어 내고 게임의 재미를 앞세운 제품에 어울리는 이름이다.
투박한 이름이지만 무엇을 팔려는지는 쉽게 전해진다. 키보드를 빼서 쓰는 법을 단순하게 만든 것처럼 이름도 게임기로서의 쓰임을 드러냈다.
1985년 출시로 알려진 재믹스
재믹스는 대체로 1985년에 나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다만 1984년이나 1986년으로 적은 자료도 있다. 수집가 사이트에 월일까지 실려 있더라도 당시 신문이나 대우 광고로 뒷받침된 날짜는 아니다. 이 글은 연도만 1985년으로 적는다.
팬이 다시 올린 재믹스 광고. 제목과 화면의 1984는 흔히 알려진 출시 연도 1985년과 다르다. 대우 공식 채널의 영상은 아니다.
팬이 다시 올린 광고 영상에는 1984라는 숫자가 제목과 화면에 붙어 있다. 흔히 알려진 출시 연도인 1985년과 차이가 난다. 옛 광고에 나중에 붙은 제목이나 자막의 연도를 곧 제품 출시 연도로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당시 가격은 본체 7만 원대, 조이스틱을 함께 사면 8만1천 원대였다고 전해진다. 다만 원래 광고로 뒷받침된 가격은 아니어서 대략의 추정값이다.
팬이 모아 올린 1980년대 대우 MSX·재믹스 광고. 대우 공식 채널의 영상은 아니다.
팬들이 모아 둔 영상에는 대우 MSX와 재믹스의 옛 광고가 남아 있다. 대우가 공식 채널에서 복원한 영상은 아니지만 텔레비전에서 제품을 어떻게 보여 주었는지는 볼 수 있다.
V와 슈퍼V를 지나 터보로
CPC-50 다음에는 재믹스 V인 CPC-51이 나왔다. 출시 시기는 자료마다 1987년과 1988년으로 갈려 1980년대 후반으로 보는 편이 알맞다.
1990년 슈퍼V CPC-61은 MSX2 규격을 따랐다. 화면을 처리하는 칩은 V9938이며 출시 가격은 13만5천 원이었다. 키보드를 뺀 게임기로 시작했지만 세대를 올릴 때도 대우는 MSX 컴퓨터 규격의 다음 버전을 그대로 따라갔다.
1991년 터보 CPG-120에는 Yamaha V9958과 터보 버튼, 일시정지 기능이 들어갔다. 출시 가격은 14만8천 원이었다. CPU는 골드스타 Z80A를 썼다. 터보 버튼을 누르면 작동 속도를 3.58MHz에서 약 5.37MHz로 높이는 방식으로, Z80B를 단 제품은 아니다.
터보를 MSX2+로 부르기도 한다. 하지만 화면 처리 칩 V9958은 갖췄어도 MSX2+의 기본 프로그램인 BIOS-BASIC은 빠져 있었다. 다음 규격의 일부만 받아들였으므로 온전한 MSX2+라고 하기에는 차이가 있다.
영어 위키에는 단종 연도가 1995년으로 적혀 있지만 출처가 없다. MSX를 바탕으로 한 재믹스의 마지막 모델은 1991년 CPG-120이다. 대우가 NEC PC엔진을 들여와 재믹스 PC셔틀이라는 이름으로 판 해는 그보다 앞선 1990년이었다. PC셔틀은 이름을 함께 썼을 뿐 MSX와는 다른 계열의 게임기다.
쉬운 사용법과 오래된 사양
재믹스의 장점은 쓰기 쉽다는 데 있었다. 텔레비전 앞에 놓기 편한 크기에 카트리지만 꽂으면 됐으니 아이에게 컴퓨터 규격부터 설명할 필요도 없었고 MSX용 프로그램을 게임기에서 즐기는 길도 그만큼 단순했다.
성능에는 한계가 있었다. MSX1에서 출발한 재믹스는 후속 모델에서도 이미 뒤처진 컴퓨터 규격을 따라갔다. 한동안 경쟁자가 없었던 덕도 컸다. 재믹스가 사랑받았다는 사실과 다른 게임기보다 잘 만들었다는 평가는 나누어 보아야 한다.
그럼에도 카트리지만 꽂아 놀던 기계라고 하면 재믹스를 떠올리는 사람들이 지금도 있다. 재믹스 말고는 고를 것이 없던 시절이 있었다는 점도 그 기억에서 빼기 어렵다.
1989년, 안방에 들어온 경쟁자들
재믹스의 독점이 끝난 때는 1989년으로 알려져 있다. 삼성전자는 세가 마스터 시스템을 겜보이로 들여왔다. HG101에 따르면 그해 4월에 나왔고 가격은 11만9천 원이었다. 삼성 뉴스룸의 임직원 회고에도 같은 가격이 등장한다.
현대전자는 북미판 NES를 컴보이라는 이름으로 팔았다. HG101은 출시 시기를 1989년 10월, 가격을 13만9천 원으로 전한다. 세가와 닌텐도의 게임기가 각각 삼성과 현대의 이름으로 들어오면서 안방의 선택지도 늘었다.
이제 카트리지 게임기를 고른다는 말이 곧 재믹스를 고른다는 뜻은 아니었다. 겜보이와 컴보이가 더해져 세 게임기가 경쟁하게 됐다. 훗날 삼파전으로 기억되는 시기는 그렇게 시작됐다.
게임기는 기록이 없고 컴퓨터는 해외로 나갔다
재믹스 게임기가 해외에서도 팔렸는지는 알려진 기록이 없어 불분명하다. 그렇다고 수출이 전혀 없었다고 단정할 근거도 없다. 해외 판매 이야기는 대우가 만든 MSX 컴퓨터와 구분할 필요가 있다.
대우의 IQ·DPC·CPC 계열 컴퓨터는 해외에서 Talent, Yeno, Dynadata라는 다른 이름을 달고 팔렸다. 재믹스 게임기의 해외 판매와 별개로 대우 MSX 컴퓨터는 다른 나라의 사용자도 만났던 셈이다.
MSX 자체는 애초 미국 시장을 염두에 둔 규격이었다. 하지만 코모도어가 가격 경쟁을 벌이던 미국에서는 거의 자리를 잡지 못했다. 스펙트라비디오와 야마하 CX5M 정도가 잠깐 보였고 가정의 카트리지 게임기 자리는 다른 제품들이 차지했다.
팬들이 세 번 다시 만든 재믹스
대우가 게임기를 접은 뒤에도 재믹스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2013년에는 팬들이 FPGA로 옛 기기의 회로를 재현한 재믹스 네오를 약 100대 만들었다. 대우의 생산 라인에서 나온 제품과는 다른 시작이었다.
2019년 4월 18일에는 재믹스 미니가 온라인으로 판매됐다. 게임동아에 따르면 준비된 물량은 2분 만에 품절됐다. 얼마나 만들었는지는 보도마다 차이가 있지만 빠르게 팔려 나갔다는 소식은 같았다.
2021년에는 재믹스 슈퍼 미니가 롯데마트 토이저러스에 나왔다. 흰색 700대와 검정 700대, 한정 300대로 선보였다. 옛 제조사가 게임기 사업을 다시 시작한 것이 아니라 재믹스를 아는 사람들이 제품을 다시 만든 경우였다.
원래 제조사가 손을 뗀 뒤 세 번이나 다시 만들어진 게임기는 흔치 않다. 키보드를 빼고 카트리지만 남긴 단순한 기계를 사람들은 오래 기억했다. 완벽한 성능을 갖추지 못했어도 함께 놀던 기억까지 사라지지는 않았다.
재믹스 CPC-50은 1985년 출시로 알려진 대우의 MSX1 카트리지 전용 게임기다.
Zemmix라는 이름은 '재미있다'와 컴퓨터 규격 MSX를 합쳐 만든 말로 알려져 있다.
재고떨이·무허가 설은 대우·아스키 문서로 확인되지 않으며 MSX.org는 로고가 없는 까닭을 키보드에서 찾는다.
터보의 CPU는 Z80B가 아니라 속도를 높인 골드스타 Z80A였고 1989년 겜보이·컴보이가 경쟁에 들어왔다.
재믹스는 해외 판매 여부가 불분명하나 대우 MSX 컴퓨터는 수출됐고 팬들은 재믹스를 세 번 다시 만들었다.
"키보드 없는 숨은 MSX." — MSX.org, 대우 CPC-50의 로고 부재를 설명하며
재믹스는 MSX에서 키보드를 덜어 내고 카트리지만 꽂아 즐기도록 만든 게임기다. 한동안 안방을 차지했지만 그 인기를 성능만으로 설명하기는 어렵다. MSX 재믹스는 1991년 터보까지 이어졌으며 이 모델은 골드스타 Z80A의 작동 속도를 높여 썼다. 재고떨이나 무허가 출발이라는 이야기는 대우나 아스키의 문서로 뒷받침되지 않는다. 대우가 게임기를 접은 뒤에도 팬들이 세 차례 다시 만들 만큼 재믹스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남았다.